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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해 1번지 울산’ 환경운동 초석 다져 / 한기양 (경영 7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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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연합(1)
‘민중선교’에 뛰어든 신앙인 한기양… ‘공해 1번지 울산’ 환경운동 초석 다져
한기양(현 굿미션네트워크 사무총장, 울산환경운동연합 고문)은 맹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다 삼킬 수 없어 절반만 삼키고 나머지는 내뱉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곧 사람들이 올 것이다. 일이 점점 더 커질 것이고, 농성도 장기화할 게 뻔하다.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은데 단식을 강행한 것은 사안이 워낙 긴박해서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무슨 기도를 할까…. 1991년 7월 1일 경남 울산군(현 울산광역시) 온산공단 비철연관 5차단지 공터. 환경운동사에서 ‘역사적인 회합’이 이루어진 이날은 그가 한국티타늄 공장 부지인 이곳에 천막을 치고 단식농성에 들어간 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당시 그는 듀폰·한국티타늄·럭키금속 등이 계획하던 이산화티타늄 공장의 울산·온산공단 입주를 저지하기 위한 이산화티타늄공장건설저지범시민공동대책위원회 대표를 맡고 있었다. 공해 공장 증설 ‘육탄저지’ 나서 울산 효성교회(현 새생명교회) 담임목사이자 울산공해추방운동연합 준비위원회(이하 울산공추련) 위원장인 그는 원래 울산 사람이 아니었다. 울산에 환경운동을 하러 온 것도, 선교하러 온 것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공해1번지 울산에 더 이상 어떠한 공해공장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산화티타늄 공장 건설을 ‘육탄 저지’하게 된 사연이 무엇일까. 한기양은 경남 진양에서 태어나 진주고와 국민대 경영학과(76학번)를 나왔다. 원래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 출신이었지만 처음부터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환경운동가가 될 생각도 없었다. 대학 시절 운동권으로도 빠지지 않고 학보사 기자로 활동했다. 학교 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중도에 군에 입대했다. 이때까지도 그는 세상을 잘 모르는 모범생 축에 들었다. 그런데 제대한 때가 현대사의 격랑이 대학가를 덮친 시점이었다. 1979년 10·26사태, 1980년 ‘서울의 봄’과 5·18광주민주화운동… 여기서 그의 인생이 바뀐다. 복학해서 학보사에 복직한 그는 운동권이 된다. “이라마 안 대자나.” “사람이 마이 죽었는데 또 폭도로 몰자나.” 그가 운동권이 된 이유는 단순했다. 광주의 참극이 그를 운동권으로 인도한 ‘스승’이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겁이 없어졌다”는 게 그의 최근 회고다.
신앙인에게는 신의 인도(引導)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 신은 그를 노동운동가보다 다른 용도로 쓰려고 했던 듯하다. 그는 현장 이전에 실패한다. 병이 생긴 데다 개인적인 어려움까지 겹쳐 결국 현장을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 즈음 예장(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쪽이었던 그의 종교적 성향은 진보적인 기장(한국기독교장로회)으로 완전히 넘어가 있었다. 그는 기장에서 운영하던 선교교육원에 들어갔다. 선교교육원은 정치적으로 암울하던 시절 갈 데 없는 운동권 ‘빵잡이’에게 도피처이자 목회자 자격을 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곳이다. 그는 낮에는 ‘마당’지 기자생활을 하고 밤에는 선교교육원에 다녔다. 민청련에도 관여해 한국공해문제연구소의 최열(현 환경재단 대표)과도 이때 알게 됐다. 1987년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고민에 빠졌다. 목회활동이냐 조직운동이냐를 놓고 심한 갈등을 일으켰다. 결국 그는 양쪽과 타협해 ‘민중선교’를 택했다. 인천 부평4공단에 노동자교회를 설립하기로 했다. 사노맹의 지지를 받는 가운데 그는 이를 위한 준비를 착실히 해 나갔다. 여기서 그의 신은 또 한 번 심술(?)을 부린다. 장고 끝에 결정해 준비까지 다 해놓은 노동자교회를 접고 생각지도 않던 울산으로 가라고 명령한 것이다. 1988년 13대 총선이 끝난 직후였다. 그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얼굴을 모르는 친구가 울산에서 올라와 나를 찾아왔다. 성균관대 운동권 출신인데 진주고 후배라고 했다. 그가 ‘울산에 노동자의 언덕이 돼줄 교회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며 내가 내려가서 그 역할을 해주기를 바랐다. 알고 보니 ‘민중의당’과 연결된 친구였는데 현대중공업 출신 노동자 시인 백무산의 끄나풀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울산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이미 늦었다. 좀 일찍 오지.” 그는 후배를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부평에 노동자교회를 세울 준비를 모두 마친 그는 마지막으로 원주 치악산 토굴에 들어가 20일 동안 기도했다. 울산에서 부르는 것이 다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하나님은 아무 응답이 없었다. 그것은 허락을 의미했다.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산했다. 예수님이 갔던 고난과 복음의 터전 ‘갈릴리’를 향해서…. 그런데 서울로 돌아오면서 그의 귓전에 맴도는 성경 구절이 있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라 하시니라.’(요나서 1장 1~2절) 성경에서 요나는 심판을 앞둔 니느웨(고대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지칭)를 회개시키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한 예언자로 묘사된다. 요나는 니느웨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나 큰 물고기의 밥이 된다. 구원의 기도 끝에 살아난 요나는 ‘일어나 니느웨로 가라’는 거듭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게 된다. 성경 속 ‘니느웨’ 울산을 향하다 갑자기 그에게 울산이 니느웨로 보였다. 저 큰 성읍 울산이 나를 부르고 있다. 이를 피해 부평으로 갔다가는 큰 고기의 밥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울산에 연락을 취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1988년 8월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아무 연고 없는 울산으로 내려갔다. 다시 그의 회고를 들어보면….
한국 최대의 산업도시인 울산은 환경운동의 메카와 같은 곳이다. 1967년 울산공단이 본격 가동되면서 공해 피해로 인한 주민 투쟁이 시작됐으며, 1978년부터는 온산공단을 중심으로 공해병이 나타나면서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관심과 논란을 야기한 바 있었다. 최열이 ‘세계적인’ 환경운동가로 우뚝 선 것도 1985년부터 시작된 온산병 사태를 통해서였다. 이처럼 울산이 한국 환경문제의 최전방에 서 있었지만 여기에 조직적으로 대처할 환경운동단체가 없었다. 주민대책위와 같은 피해 당사자 조직은 있었지만 이들의 활동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시민사회의 역량을 조직할 제3자 기구는 없었다는 얘기다. 온산병 사태에 개입한 환경운동단체는 서울의 공해문제연구소와 부산지부 등이 고작이었고, 현지에서는 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이하 울사협)가 참여한 정도다. 온산병 사태의 현지 대책기구는 최열 등 서울의 환경운동가와 공해문제연구소 부산지부의 구자상(현 부산환경운동연합 대표), 울사협의 박종희(현 통일시대충북연대 공동대표) 등이 주요 멤버였다. 구자상은 울산에 출퇴근하다시피 하면서 온산병 대책기구에 참여했다. 박종희는 노동운동을 하려고 청주에서 울산으로 왔다가 울사협 실무간사·사무국장을 맡는 바람에 온산병 대책에 깊이 관계하고, 나중에는 울산 시민사회의 중심 인물이 된다. 그러나 한기양이 울산에 오기까지 자생적인 환경운동은 조직되지 않았다. 한기양은 울산에 터를 잡자마자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다. 당시 울산은 노동운동의 천국이었다. 운동권의 모든 정파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1976년 최열이 감옥에서 “다들 노동운동하겠다고 하니 그렇게 되면 나라가 큰일나겠다”며 환경운동을 결심했던 것과 비슷한 이치로 그 역시 “정작 울산이 필요로 하는 것은 환경운동”이라고 생각했음직하다.
출처 : 2007 01/16 뉴스메이커 708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