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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석원 회장 1주기 추모사 - "나는 그러면 누구한테 사표 내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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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金錫元 회장 1주기 추모사
金錫元 회장 1주기 추모식에서 추모사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아니 벌써 1년?"이란 놀라움과 함께 이 참에 故人과의 관계를 정리해보야야겠다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1945년생 해방둥이 사이로서 1985년 8월호 월간조선에 40대 기수 인터뷰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한 세대에 걸쳐 참으로 긴 대화를 나눈 관계였습니다. 1975년 선친 省谷 선생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만 서른에 쌍용그룹 회장이 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김 회장은 "유쾌한 청년" 같은 젊은 총수가 되어 있었고 "종합상사에 한국의 엘리트가 다 모여 있다"는 식으로 자신만만해 하였습니다. 다시 그 9년 뒤 1994년에 열 시간이 넘는 인터뷰를 했을 때는 제가 잡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해방둥이로서 한국 나이로 벌써 50세, 재벌회장 재직 20년째를 맞은 金회장은 사람을 아주 편하게 해주었다. 그는 겸손하고 조용조용한 말투로써 국제화, 교육, 자동차, 경영철학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金회장은 "국제적 규칙을 지키는 것, 폭 넓은 교양,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자세가 바로 국제인의 3大조건"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킬 수 있는 法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국제화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하였다.">
그 3년 전 강원도 고성에서 세계스카우트 잼버리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던 김 회장이 당시 話頭가 되어 있었던 '세계화'에 대하여 한 말은 지금 다시 읽어도 멋진 한 편의 강의였습니다. 다시 그 1년 뒤, 추석을 앞둔 1995년 가을, 저는 정치인으로 변신한 김 회장을 만나 이태원 자택에서 또 밤을 새운 인터뷰를 했는데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했습니다.
<여섯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는 벌써 세 번째 담배갑을 열었다. 보통 피우던 두 갑 수준을 넘어선 것은 스스로 긴장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업총수로서 달려왔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20년 경력이 泥田鬪狗판의 정치세계에서 어떻게 발휘될까. 해방둥이로서 만 50에 제 2의 인생을 출발한 金 위원장의 배웅을 받으며 바깥으로 나서니 보름달이 마당 가득 비추고 있었다.>
제가 성곡언론재단의 도움으로 하버드 대학의 세계적 언론인 연수 프로그램인 니만 펠로 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지 두 달이 지난 1997년 가을, 외환위기의 파도가 덮치고 있을 때, 이곳 용평에서 언론인 초청 만찬이 있었고 김석원 회장은 하회 탈을 연상시키는 그 특유의 매력적인 웃음으로 재회를 반가워하면서도 "요사이 하루하루가 어렵다"고 약한 면을 보이던 그 표정이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 무렵인지 언제인지 모르겠는데 김 회장은 그만두겠다는 임원에게 "난 그러면 누구한테 사표 내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가슴에 총을 맞고도 "난 괜찮아"라고 했던 박정희 대통령이나 많은 것을 이루시고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내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다는 성곡 선생 같은 선배 세대의 시대적 역할은 "Bridge over troubled water", 즉 이 험한 세상에 다리를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리를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진격한 저희 해방둥이들은 배고픔을 아는 마지막 세대이고 풍요를 즐기는 첫 세대가 되었으며 가장 빨리 높게 멀리 달렸고 그래서 가장 크게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세대의 선두 주자 김석원 회장이 넘어졌을 때, 그 많던 친구들이 사라져 갈 때 그를 위하여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주셨던 사람들이 오늘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체제로 건국한 이후 역사상 처음으로 기업인들이 새 역사 창조의 주인공이 되었고 이들의 奮鬪 덕분에 우리는 "The greatest story ever told", 즉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되었으며, 김석원 회장은 그 이야기의 필자 중 한 분이십니다. 시대가 바뀌어 士農工商의 士자 계급에 속하는 이른바 신종 양반세력, 언론인 검사 판사 학자 정치인 관료들이 민주화의 흐름을 타고 주도권을 잡는 세상이 되자 저는 어느덧 재판 받는 김석원 회장에 대한 선처를 구하는 탄원서를 쓰는 처지가 되고 김석원이란 이름 석 자는 잊혀져 가고 있었습니다.
2011년 7월, 한국이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권을 딴 직후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가 김 회장 인터뷰를 통하여 스키 인구가 4000명일 때 용평을 개척하여 올림픽의 길을 연 '숨은 공로자'라고 쓴 것과, 작년 별세 직전 새만금 잼버리가 파행을 하자 성공했던 고성 잼버리가 소환된 것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여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김 회장은 가장 높은 수준의 교양인이셨고, 기업인, 스포츠맨, 국제인, 교육가, 언론인, 봉사자, 그리고 월남전 파병 해병대원으로서 그가 남긴 거대하고 다양한 유산과 기억들은 우리의 삶 속에 살아 숨 쉬고 있고 대한민국 문명건설의 일부가 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김 회장을 추모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아련한 추억의 감정도 희미해지면서 기억으로퇴색되고, 기록으로 변했다가 종국엔 기념일로 남게 될 것입니다. 李炳注 선생의 말을 빌면 月光에 물들면 神話가 되고 햇빛에 바래면 歷史가 된다고 합니다. 김 회장 별세 20주년, 50주년, 100주년은 어떤 모습일까는 여기 모이신 분들의 관심과 노력으로 결정될 것입니다. 큰 인물의 진짜 승부는 관 뚜껑이 닫힌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그것은 기록과 기념의 싸움이 될 것이며 후손과 후배들이 어떻게 무엇을 계승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글로벌 스탠다드의 입장에서 늘 한국사회를 비판적으로 보면서 답답함을 토로하던 김 회장이 "나는 누구한테 사표 내나"라고 했을 때의 그 절대고독은 한 개인의 하소연이 아니라 오늘과 내일을 살아갈 사람들에게 던지는 물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해방둥이 세대의 잘못은 너무 바쁘게 살았다는 핑계로 선배세대의 위대한 이야기들을 자랑하지 못하고 묻어버린 점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이 추모식은 슬픔의 추억이 아니라 김 회장의 성공과 실패를 다 아울러 그분을 자랑스럽게 기억하자는 다짐과 희망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김석원 회장님, 당신은 좋은 세상을 만나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주고 떠났으니 우리 곁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한테 사표 내나"라고 걱정할 필요 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세요. 우리가 있습니다. 저희는 자유통일을 보고 가겠습니다. 저의 부족한 추모사를 경청해주셔서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2024년 8월26일 趙甲濟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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