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손영준의 미디어비평] 정연주 KBS의 독립성 / 손영준 (언론정보학부)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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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특정 정치세력의 도그마를 옹호하고 반대세력에 비판적인 경우를 정파적이라고 한다. 우리는 언론에 거의 무한의 자유를 부여하면서, 정파와 당파로부터 독립적일 것을 요구한다. 언론의 독립성은 두 가지 차원으로 이해된다. 정치사상가인 이사야 벌린의 '자유에 대한 두 개념'에서 제시된 논리를 원용하면 독립성은 첫째, 무엇으로부터의 독립(Independence from)이다. 이것은 언론이 국가나 권력의 부당한 통제, 강제, 개입, 간섭에서 벗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둘째, 무엇을 하기 위한 독립 (Independence to)이다. 앞의 독립성이 방해 받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면, 뒤의 독립성은 원하는 것을 자발적으로 실현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두 독립성은 겉으론 비슷해 보이나 임의로 해석되면 전혀 다른 결과가 된다. 우리 사회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후자의 독립성에 대한 해석이다. 자유민주주의 정신은 언론이 무엇을 독립적으로 실천할 경우, 첫 번째 차원의 독립성을 확보한 뒤(정파성을 배제한 뒤)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정파적 이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거나 정파적 이해를 자의적으로 추구할 경우 언론은 정파적이 된다. 언론이 정의(正義)와 공공선(公共善)을 스스로 정의(定義)하면서 그것을 수용자에게 전파하는 경우가 문제가 된다. 언론이 사회 발전과 변화의 주창자로서 특정 가치를 적극 옹호 하는 경우다. 우리의 역사적 경험은 두 번째 차원의 독립성이 임의적으로 강조될 경우 언론이 선전ㆍ선동 기구로 전락함을 보여줬다. 그것은 '공론의 장'인 언론의 존재를 결과적으로 부정한 것이었다. 정연주 KBS 사장이 많은 이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재임명됐다. 정 사장은 이번에 KBS의 독립성을 강조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모든 권력'으로부터 철저하게 KBS의 독립성을 지켜내"고 "온 몸으로 이를 지키겠다"고 거듭 밝혔다. '모든 권력'이 누굴 지칭하는 지 분명치 않지만 독립성이 가지는 두 의미 중 첫 번째를 강조한 게 분명하다. 사실 정연주 1기 체제는 두 번째 차원의 독립성이 자의적으로 해석된 것이 특징이다. KBS는 참과 거짓을 스스로 규정하고 그것을 사회적 정의라는 이름으로 실천했다. <생방송 시사투나잇>이 그랬고, <인물현대사> <미디어포커스>가 그랬다. 미국 클린턴 전 대통령의 정치참모였던 조지 스테파노풀러스의 ABC 진행을 예로 들어 문성근의 <인물현대사> 진행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 것은 무엇을 실천하기 위한 독립성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다. 탄핵 국면에서 7대3의 여론 비율을 방송 논조의 근거로 삼은 것은 방송 독립성을 임의로 해석한 극치다. 만일 그것이 옳은 논거라면, 지지율 한자릿수인 노무현 대통령이나 사퇴 여론이 그 반대보다 4배 가까이 되는 정 사장에게도 같은 논리가 적용돼야 한다. 필자는 정연주 1기를 기자 정연주식 해석이 투영된 시기로 이해한다.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독립성은 다수나 소수, 지배와 피지배의 모든 정파적 이해관계로부터 독립적일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연주 사장 2기는 모든 외부 권력으로부터 KBS의 독립성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한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석연치 않음을 발견한다. 정 사장은 방송의 독립성을 필요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고, 해석하고 있다. 방송의 독립성을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정 사장의 주장이 진정성을 담고 있다면, 먼저 모든 당파적 영향을 배제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을 보여줘야 한다. 임명권자인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어떻게 독립성을 확보할 것인지를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2기 취임사는 공허한 것이 된다. 공영방송의 독립성은 민주주의를 위해 필수적이다.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혼란과 고통의 저변에서 공영방송 KBS의 책무가 막중함을 인식해야 한다. 독립성은 정파성이 배제된 상태다. 방송의 독립성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편의적으로 활용한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방송의 독립성을 침해한다. 정 사장이 취임사에서 밝힌 것처럼 "지금처럼 정파적 이념적 대립과 분열이 극심한 때" 방송의 독립성을 임의적으로 잘못 해석하는 것은 공영방송 수장으로서 바른 길이 아니다. KBS의 앞날, 우리 사회의 미래에 진한 의구심이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정연주 사장이 기자일 때가 좋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