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고전으로 배경지식 키우기] 악마는 바로 우리 곁에 있다 / 김영수 일본학연구소 책임연구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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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는 근대의 폭력 인류의 비극은 인간의 악에서 왔다. 2차대전 직후 창설된 유네스코는 그 헌장의 전문에서 “전쟁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비롯되므로(wars begin in the minds of men) 평화의 방벽을 세워야 할 곳도 인간의 마음속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것은 악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다. 그러나 20세기의 악은 리차드 3세의 악마성과는 다르다. 카프카의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흉측한 갑충이 된 자기를 발견한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 게오르규의 모리츠는 또 다른 그레고르들이다. 그들 역시 어느 날 수용소에 있는 자기를 발견한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이처럼 알 수 없고, 어찌할 수도 없는 악은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일까? 1945년 원폭이 투하되자, 이성의 빛이 악의 충동을 비출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희망은 파산했다. 현대의 시작이다. 인간은 모든 생명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지구의 재앙이 되었다. 그런데 절망의 깊이는 단지 폭력의 크기와 잔인성 때문만이 아니다. 전근대의 폭력은 훨씬 잔인했다. 그러나 가해자와 희생자는 서로를 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현상적 악을 제거하면 평화가 도래할 것으로 믿었다. 근대의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원폭을 투하한 비행사는 보턴을 눌렀을 뿐이다. 그는 죽는 자들의 고통과 슬픔에 직면할 필요가 없다. 비행을 끝낸 그는 귀가하여 가족과 안락한 저녁을 보낼 것이다. 그는 악인이 아니며, 그의 모든 행위는 직업상의 일일 뿐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 이상한 비극의 구조, 그리고 악의 성격을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스승은 야스퍼스이며, 연인은 하이데거이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20세기 어두움의 한 가운데를 걸어왔다. 독일계 유태인인 그녀는 단지 유태인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만으로 체포되고, 수감되고, 망명해야 했다. 1933년 파리로 도망쳤고, 수용소에 갇혔다가, 1941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그녀는 자신이 경험한 모든 어두움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너무 평범한 유태인 학살책임자 아렌트가 제시한 충격적인 개념의 하나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다. 악마는 바로 우리 이웃에 있다는 것이다. 1960년, 유대인 학살책임자 루돌프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이스라엘 재판정에 섰다. 이스라엘은 그를 “인간의 얼굴을 한 악마”로 만들어 유태인의 수난과 이스라엘 건국의 정당성을 선전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는 괴물이 아니었다. 나치의 정강도 몰랐고, 반유대주의자도 아니었다. 단지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좋은 관리이자, 충실한 가장이었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너무 평범했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이근안을 연상케 한다. 범죄 의사도 없고, 단지 매트릭스의 한 부분이었을 따름이라면, 그의 죄는 무엇이고 어떻게 처벌될 수 있는가? 이스라엘 법정은 “누구도 그와 지구에서 공존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사형을 언도했다. 검사는 선악을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행동하지도 않은 죄”를 지적했다. 그러나 이는 종교적 판단에 가깝다. 요컨대 이러한 종류의 악은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아렌트는 “이 악은 인간들이 벌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악한 동기에 의해서도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인간의 모든 반응들은 무력하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 악이 어디에서 기원하고, 그 성격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20세기의 인류가 치룬 참혹한 경험으로부터 알아내야 할 정신적 과제이다. 전체주의… 인간성의 완전한 파괴 아렌트는 이 불가사의한 악의 기원을 전체주의에서 찾았다. 그리고 전체주의는 근대가 낳은 무서운 자식이다. 그것의 목표는 인간성의 완전한 파괴이기 때문에 단순한 독재가 아니다.(‘전체주의의 기원’) 근대의 무엇이 이 전체주의를 낳았을까? 그것은 ‘정치’가 소멸하고 ‘사회’가 중심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정치는 본래 자유로운 인간들의 명예로운 활동이었다. 그러나 정치는 중세에는 종교에 의해, 근대에는 경제에 의해 대체되었다. 근대인은 생산과 소유에 몰두함으로써 개성을 상실한 표준화된 생활인이다.(‘인간의 조건’) 그가 바로 아이히만이다. 그 결과 너무 평범하면서도 상상할 수 없는 폭력과 근본악이 탄생했다. 아이히만은 지극히 정상적이지만, 단지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