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언론속의 국민

[과학이야기] 삶과 사회를 바꾸는 엔지니어링 / 한화택(기계·자동차공학부) 교수

걷기좋은 서울은 과학기술 덕분
버스나 지하철 이용도 편하고 청계천개발로 도심공기도 맑아져
동네어귀 한그루의 나무가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를 바꾸듯 잘 엔지니어링된 기술ㆍ환경 중요

 
 
`새로운 기술이 생활을 바꾼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기술발전이 문명을 이끌어 왔고, 더 나아가 물질문명이 정신적 세계와 문화를 바꾸어 왔다. 위대한 발명품이란 여러 측면에서 인류의 삶을 크게 바꾸어 놓은 것들이다. 인류 최고 발명품으로 나침반과 화약, 인쇄술을 꼽는다. 나침반은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파악할 수 있게 해 항해는 물론 원거리 육로 여행을 가능하게 해줬다. 인류 문화집단 사이의 소통과 교류를 가능하게 해준 것이다.

화약은 전쟁터에서 창과 칼로 싸우던 전투 양상을 바꾸어 놓았고 무기의 형태뿐만 아니라 견고한 성의 형태까지 바꾸어 놓았다. 또 인쇄술은 소수의 사람들만 가지고 있던 지식을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해 인류의 지적 수준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지식 전파에 기여한 역할로 종이나 금속활자와 같은 인쇄술을 꼽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인류의 기술 발전을 세계사적 관점에서 거창하게 논하고 싶지는 않다. 단순하게 우리가 접하고 있는 여러 가지 제품들로 인해서 우리들의 생활이 바뀌어왔고 또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집의 구조가 바뀌면 행동양식이 바뀌고 거기에 따라서 생활양식도 바뀐다.

하다 못해 벽에 박힌 못의 위치에 따라 가족들이 옷을 거는 행동이 달라지고 그것이 습관으로 형성되며 그 습관으로 인해서 좋건 나쁘건 그 가족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20세기 초 주부들이 꿈꾸었던 냉장고가 보급되면서 식생활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휴대폰이 보급되면서 의사소통 방식이 바뀌었고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경제활동과 생활방식이 디지털 공간에서 이뤄지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

나의 생활도 여러 가지 문명의 이기들 덕분에 바뀌어 왔다. 미국에 유학 갔을 때 자동차 없이 살 수 없는 그 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동차의 편리함을 만끽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불편이 없고 오가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남의 간섭을 받지 않는 나만의 작은 공간에서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오픈카를 타고 비치보이스의 `Surfin USA`를 들으며 석양이 지는 캘리포니아 해변 도로를 질주하는 장면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도록 미국식 자유가 느껴진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런 편리함과 자유로움을 계속 누리고 싶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자동차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다행히(?) 모든 것이 자동차 중심으로 바뀌고 있었다. 좁은 길은 넓혀지고 주차장은 계속 만들어졌다.

그러나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자동차 수요를 맞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러 가지 여건이나 환경이 미국과 같지 않음을 항상 불평하면서도 자동차는 이미 습관이 돼 버렸다.

언젠가부터 나는 동네의 작은 초등학교 운동장을 걷기 시작했다. 차로 인해 편한 만큼 항상 운동 부족을 느끼고 있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운동할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밤늦은 시간에 학교 운동장을 찾았다. 생각 외로 많은 사람들이 컴컴한 운동장을 걷고 있었다. 사람들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막 속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걷고 있었다.

말 없이 동일한 동작을 반복하는 것이 마치 사이보그들처럼 보인다. 빨리 걷는 사람, 손뼉을 치며 걷는 사람, 뒤로 걷는 사람, 체조를 하며 걷는 사람 등 가지각색이다. 한 시간쯤 돌고 나면 땀이 촉촉하게 나며 몸이 가뿐해진다. 나무가 많고 공기가 좋은 공원 같은 곳을 걸으면 더없이 좋겠지만 멀리 가야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그냥 가까운 운동장이나 동네 한 바퀴를 도는 것이다.

한참 동안 운동장을 걷다 보니 한심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걸을 수 있는 거리도 차를 타고 가는가 하면 일부러 시간을 내서 걷고 있다니. 우리가 사는 도시가 일과 쉼, 놀이와 운동, 생활이 모두 한데 어우러지는 그런 곳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을 하러 걸어가는 것이 자연스럽게 운동이 되고, 걸어가는 동안 놀이와 쉼이 함께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런 삶 말이다.

영국의 찰스 황태자는 `영국건축 비평서`를 통해 쾌적하고 인간적인 크기의 도시환경을 만들기 위한 어번빌리지 운동을 태동시킨 바 있다.
 
어번빌리지란 지속 가능한 크기로 다양한 용도와 유형의 커뮤니티가 혼합돼 있는 전원도시를 말한다. 기본 개념으로 토지의 복합적 이용, 도보권 내 학교 및 공공 편의시설 배치, 도심지 내 녹지공원 개발 등이 있다. 녹지와 도심이 한데 어우러져 있고 일터와 가정이 연계돼 있는 적절한 크기의 마을들을 만들어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마을들로 이뤄진 이상적인 왕국을 꿈꾸었던 것이다.

걷는 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요즘은 가능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다. 버스전용차선 덕분에 속도가 빨라진 효과도 있지만,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내리고 갈아타는 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다. 청계천이 개발되면서 도심 전체가 깨끗해지고 공기도 많이 맑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울을 활보하고 다니면서 마음껏 느낄 수 있는 것이 너무 좋다. 예전에 자동차를 고집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시간도 시간이려니와 공해 속에서 제시간에 오지 않는 버스를 목을 빼고 기다리는 것이 번거로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래 전부터 지하철을 이용하던 친구에게 이제 나도 지하철을 이용하노라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대뜸 자신은 더 이상 지하철을 타지 않는다는 것이다. 놀라서 물어보니 지하철 대신 버스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지하철은 빠른 시간에 정확하게 목적지에 도착하게 해주지만 지하 굴속을 타고 가는 동안의 시간이 아까워 차라리 5분 더 걸리더라도 버스를 타고 바깥세상을 구경하면서 가겠노라는 얘기다. 나보다 항상 한 수 앞서 가는 친구다.

동네 어귀에 심어져 있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그 동네 사람들의 생활을 바꾸어 놓는다. 나무에 새들이 깃들 듯이 마을 사람들이 깃들고, 거기서 그 동네의 문화가 만들어진다. 그런 맥락에서 나무 한 그루도 허투루 심어서는 안 된다.

잘 엔지니어링된 제품이나 기술 또는 환경은 많은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해주고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인도한다. 그만큼 엔지니어 역할이 중요하다.

우리 동네뿐만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제대로 엔지니어링 되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이 제대로 엔지니어링 됐으면 좋겠다. 그보다 더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나의 주변과 나의 일과시간부터 제대로 엔지니어링 해야겠다.

원문보기 :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07&no=375665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