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한글은 큰 멋지음” 그 속에 흠뻑 빠지다 / 금누리 (생활문화 디자인학과)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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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숭동 쇳대박물관 건물 외벽에 안상수 교수가 디자인한 한글담쟁이가 매달렸다. 한글에 빠진 시각예술가, 금누리(右)·안상수 교수가 작품 앞에 섰다. [사진=최정동 기자]9일은 제561돌 한글날. 한글학자도 아니면서 한글에 흠뻑 빠져 사는 두 사람이 있다. 조각가 금누리(55) 국민대 교수와 디자이너 안상수(54) 홍익대 교수. 금씨는 가곡 ‘그네’의 작사가 금수현 선생의 아들로 지휘자 금난새 씨의 동생이다. 조각가이면서도 한글에 입체미를 더한 ‘금누리체’를 고안해 쓰는 등 한글 타이포그래피(typography)에 관심이 많다. 안씨는 디자인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한글 디자인으로 문자환경을 일신한 타이포그래퍼다. 홍익대 70학번 동기로 30년 지기인 두 사람이 한글을 소재로 2인전(12일까지)을 열었다. 의미 전달의 수단으로만 쓰던 한글의 모양새를 새삼 뜯어보게 하는 전시다. 장소는 서울 동숭동 쇳대박물관. 안씨는 박물관 철제 외벽에 한글 자음을 나무 열매처럼 매단 ‘한글 담쟁이’를 선보였고, 금씨는 쇠붙이들을 바닥에 깐 ‘누리글길’이란 작품을 내놨다. 4일 오후 전시장에서 만난 두 사람의 ‘한글 사랑’은 뜨거웠다. 안씨가 “600년도 안 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감 있고 단단하며 당돌한 멋을 지녔다”고 하자, 금씨는 “600년 전 이미 모더니즘의 극치를 이뤘다”라고 받는다. 한글의 매력, 모더니티(현대성)와 미래를 주제로 한 이들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안상수=한글은 한마디로 ‘큰 멋지음’(큰 디자인)이다. 이렇게 창의적인 디자인이 없다. 왜 대단하냐. 가령 컵을 아무리 새롭게 디자인한들 이미 컵이라는 물건이 있지 않나. ‘한글 디자인’은 한자 패러다임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이후 우리 문화에 생명의 숨결이 불어넣어졌다고 생각한다. 금누리=한글은 삶 그 자체며, 최고의 보물이다. 온 세상의 말과 글이 6000여개인데 이 중 절반이 사라졌다고 한다. 과거 파스파·돌궐·서하·만주도 자기네 문자를 만들었지만 모두 실패하고 한자로 돌아갔다. 제대로 디자인되고, 사용하기 쉬웠다면 왜 없어졌겠나. 안상수=20여년 전 마당체(1983년), 안상수체(85년)를 만들 무렵부터 한글에 푹 빠졌다. 글자체를 만들기 위해 한글을 면밀히 관찰하다 보니 한글이라는 깊은 웅덩이에 빠졌고 그 뒤 디자이너로서의 내 삶이 바뀌었다. 디자인의 근본으로 가다보면 타이포그래피와 자연스럽게 만난다. 타이포그래피는 ‘글자멋짓’, 즉 글꼴을 만들고 멋있게 부리는 일이다. 신문·책·도로표지판·서식·웹디자인의 기본이다. 글자는 문화의 밑바탕에 있는 씨앗인지라 타이포그래피의 속성은 문화적이고 진지할 수밖에 없다. 금누리=초등 교과서 등에 널리 쓰이는 표준글꼴은 명조체(明朝體·명나라 붓글씨체)를 바탕으로 한다. 이와 달리 나와 안 선생은 글꼴을 만들때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고심한 조형적 아이디어를 염두에 둔다.
금누리=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제대로 표현이 안 되니까 새 글꼴을 만든 것이다.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나서 하늘·땅·사람이라는 철학적 요소를, 조형의 기본인 수직선·점·수평선으로 축약하는 원리를 세운 점은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한글은 고안자가 확실하며, 문명화된 글꼴이다. 600년 전 이미 모더니즘의 극치를 이뤘다. 안상수=한글은 우리 겨레에게 강제된 모던(현대적인 것)이었다. 이런 문화적 사변, 폭탄이 어디있겠나. 요즘 시대에 갑자기 모든 신문지상에 “오늘부터 새로운 문자를 써야 한다”고 발표했다 치자. 정상회담의 1만배쯤 되는 충격일 것이다. 이전의 글자가 고어가 돼 버리고 이전의 문서·문화·문명 자체가 바뀌는 거다. 오죽하면 학술원 회장급인 최만리가 목숨걸고 상소했겠나. 그는 요즘 말로 하면 “우리가 진정 민족을 위해 얘기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국제사회에서 왕따를 당합니다”라며 당시의 학계를 대변했다. 이에 47세의 세종이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고 되묻는다. 언어의 국제화와 음운학 등을 주제로 왕과 신하 사이에 일대 학술논쟁이 일었다.
안상수= 글자는 생각의 그림자, 생각을 시각적으로 사물화시킨 것이다. 항상 언어에 묶여 다니니 글자가 곧 뜻이 되기도 한다. 많은 시각예술가들이 글자의 형태에서 의미를 해방시키려 무진 노력했다. 20세기초 서양의 다다이스트, 미래파 등이 그 예다. 한글은 아직 그런 역사를 갖지 못했다. 금누리=한글은 소리글자다. 아직 글자의 틀에 갇히지 않은 어린애들은 음운을 아무렇게나 4∼5개씩 조합해놔도 어떻게든 그걸 읽어낸다. 어떤 소리든 형태화시킬 수 있는 게 한글이 지닌 바탕이고 미래성이다. 컴퓨터의 대중화로 한글 글꼴 갖고 놀기가 활발해진 점도 긍정적 미래를 대변한다. 안상수=한글은 소리 한 덩이가 하나의 글자이고 그게 바로 뜻과도 연결된다. 예술적인 한글의 미래는 한글이 의미로부터 분리되는 지점에서 싹틀 것이다. 조형 그 자체로서의 한글로 설 수 있는 그 지점이 창의력의 씨앗이다. 한글의 이미지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 지금껏 이 부분이 공터였다. 이 공터는 앞으로 우리가 뛰어놀아야 할 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