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개월만 당사에서 조용히 있어주기로 한 게 벌써 10여년이 넘었네요!” “고시공부도 얼렁뚱땅해서 합격했죠!”
김영선 국회 정무위원장(한나라당 고양 일산)의 말대로 그의 인생을 정리해보니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밖에 없다. 바로 ‘행운아’다. 그래서인지 김 위원장한테는 사람의 기분을 ‘업’시키는 에너지가 가득하다. 만성무기력증 환자도 그를 만나면 ‘약’을 선물 받은 듯 모든 시름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것만 같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어떻게 해서든 다시 일어나는 오뚜기처럼 그는 어제 쓰러져도 오늘 다시 일어나 의정활동에 여념이 없는 ‘여전사’다. 10여년이 넘는 국회 생활 속에서도 늘 흐트러짐이 없는 김 위원장의 드라마틱한 인생살이를 들어봤다.
36세에 국회의원 당선...“미혼이 더 바빠 결혼은 대책 없다”
YMCA 시민중계실 운영위원, 변호사, 36세의 젊은 나이에 국회의원 당선, 한나라당 대변인과 최고위원, 2006년 당시 박근혜 대표의 잔여 임기동안 ‘임시 당대표’를 지낸 바 있는 사람. 그리고 6년간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을 맡았고, 최근에는 정무위원장까지 역임한 의원.
김 위원장의 화려한 이력서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미혼’으로 알려진 사생활도 여간 흥미로운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슬쩍 ‘왜 결혼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예상 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결혼은 대책 없는 것 같아요. 솔직히 결혼을 왜 못하는 줄 알 것 같으면 벌써 대책을 세우고 했죠. 그래서 저를 좋아하는 팬과 애인이 하나라고 생각하고 살아요.(웃음)”
정계입문 당시 A라인 스커트 화제 “미혼 국회의원 드물어”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약간은 짓궂은 질문을 준비하고 있던 기자 입장에선 김 위원장의 솔직한 고백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오히려 “미혼이 더 바쁘네요. 요즘에는 반성해요”라며 일과 사랑에 빠진 것을 후회하는 듯한 뉘앙스다.
젊은 나이에 국회의원이 된 것도 화제였지만, A라인 스커트 또한 화제를 모으며 묘한 루머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A의원과 맞선을 봤다’라는 등이 주된 소문의 골자다. 김 위원장은 “의원 간에는 그런 소문이 있었지만 당사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라며 다소 민감할수 있는 얘기를 스스럼 없이 언급했다.
서울대 탈춤반 활동 전념 “선배들 연애 금지 지침 지켜”
김 위원장은 학창시절 서클 활동을 통해 연애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지만 막상 실천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같은 서클 선후배간의 연애를 철저히 금지한 선배들의 지침에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명의식이 강했다. 김 의원을 미혼의 수렁으로 빠트린 서클은 다름아닌 70-80년대 운동권 사관학교 격이었던 서울대 탈춤반이다.
“선배들이 같은 서클에서 '연애 사고'(?)가 발생하면 안 된다고 늘 얘기했죠. 막상 그렇게 말한 선배들은 서클 내에서 파트너를 구해 결혼을 하더군요.(웃음) 저는 그 지침을 충실히 따른 후배 중 한 사람인데, 결국 지금까지 ‘노처녀’로 있어요. 그 선배들이 책임을 져야 마땅한데 별로 그런 생각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저도 결혼 했으면 현모양처가 될 자신이 있는데.(웃음)”
어떤 질문인든 김 위원장의 대답은 거침없이 당당했다. “이미 오래 전 일이고 지금은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여유 있게 생활하고 있다”며 까다로운(?) 질문에도 성실했고, 상대방을 배려해 주는 마음까지 읽을 수 있었다.
독특한 집안 분위기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것”
김 위원장의 어린 시절 얘기로 돌아가 봤다. 미리 준비해둔 모범답안 대신 그만의 입담으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우선 그의 가풍은 독특하다.
“건설부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4남 2녀 중 장남이셨습니다. 아버지가 취직하신 직후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저희가 할머니, 사촌 등을 돌보며 아버지가 생계를 책임졌죠. 항상 대가족으로 살다보니 자식들에게 큰 기대나 별 신경을 쓰지 못하고 대학 보내는 것으로 만족하셨죠. 아버지는 자기 할 일 각자하자 주의로, 바깥에서 일어난 일은 집에서 절대 얘기하지 않으셨어요. 이 때문에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것’이라는 독특한 분위기가 형성됐어요.”
대가족 집안으로 사촌간의 왕래가 많아, 늘상 40~60여명의 사촌들이 모였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온 탓에, '사람' 만나 설득하고 협상하는 정치활동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최고위원 선출할 때도 자연스럽게 돌아다니는 편이었죠. 일례로 남들은 심각하게 고민하지만 저는 우리 집에 큰 제사를 치르는 것처럼 생각하고 재미나게 돌아다녔죠.”
김 위원장이 들려주는 후일담. 김 위원장이 국회의원이 되자 가족들은 저마다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국회의원을 만들겠다는 집안의 '권력의지'가 거의 없는데다, 그저 먹고 살면 된다는 생각이 집안 전체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잡독녀’가 된 공부벌레 “만화책부터 문학전집까지 섭렵”
어린 시절 환경 덕분에 의정활동이 즐거웠다는 김 위원장은 중고교 시절부터 공부와 책 읽는 환경이 조성됐다고 한다. 어린나이에 ‘스스로 나를 돌보고 키워야 된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이 때문에 늘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고, 잡학 다독을 할 정도로 책을 좋아했다.
“문학 전집은 물론이고 위인전 등 어린 시절 다양한 책을 두루 섭렵할 정도로 ‘잡독’하는 성향이에요. 특히 집중한 부분은 만화책이죠. 손오공 등 수 많은 만화책을 탐독했어요. 책을 쌓아놓고 읽었죠.”
이런 그에게 삶의 전기가 있었다. 부산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김 위원장에게 아버지가 “전교1등을 하면 서울구경 시켜주겠다”고 제안해 온 것. 아버지 제안에 김 의원은 오기가 발동해 작심하고 시험 공부에 매달렸다. 결과는 당당히 전교 1등을 차지했다. 그런 그에게 뜻밖의 일이 생겼다.
“평소 아버지는 잘한다고 상을 주시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상을 내걸 길래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결국 그 의도가 드러났어요. 서울 구경 대신 아예 서울로 이사를 가더라고요. 그런데 아버지가 약속을 지킨 건가요, 아니면 안 지키신 건가요. 그게 항상 궁금합니다.”
부산은 ‘팥죽’ 서울은 ‘떡볶이’...전학 후 문화적 충격받기도
서울로 전학 온 김 위원장은 문화적 차이로 한 동안 충격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별다른 어려움 없이 ‘평탄한’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쉬는 시간에 서울 학생들은 남학생들과 사귀는 얘기를 많이 하더라구요. 부산 출신인 저는 전혀 그런 얘기를 못 들어봤어요. 또 쇼킹한 건 부산에서는 팥죽을 먹는데 서울에서는 떡볶이를 먹더라고요. (웃음) 그 이후에는 무덤덤하게 학교, 집만 왔다 갔다 했어요.”
평탄한 학창시절을 보낸 김 위원장은 서울대 법대 진학 후 새로운 사회를 경험하게 됐다. 책을 통해서 사회와 세계를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해 왔는데, 학내의 격렬한 시위와 충돌을 접하며 무력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말수도 적어졌고, 실어증 비슷하게 생각이 끊겼다.
“느낌이나 생각은 나는데 이것을 자연스럽게 표출하는데 얘를 먹었어요. 동아리 활동도 내가 너무 책만 좋아하다보니 다른 분야에 약한 것 같아 가입했죠. 제게 변화를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문화서클 ‘탈출반 가입’…“4년 내내 농촌활동에 푹 빠져”
김 위원장은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배우기 위해 탈춤반을 선택했했다. 탈반은 대학생활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과공부보다 서클활동을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4년간 농촌활동도 정말 많이갔죠. 탈반은 운동권과 문화서클 두 가지 성격이 겹쳐 있었어요. 운동권서클이 사회적 기여만 고민한다면 탈반의 다른 인문학적 고민이나 다양성에 관한 체험을 많이 했죠. 이런 경험탓인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문화적 흐름을 정치와 접목시키는 것을 이해할수 있었어요. 새로운 이슈나 방향, 내 나름대로 정치를 보는 관을 갖는데도 큰 힘이 됐죠. ”
김 위원장은 공연활동도 많이 했다. 일주일에 하루는 공부, 하루는 후배들 지도, 하루는 후배들이랑 공연준비에 열성적이었다. 대신 실력이 부족했다는 점도 강조했다.
한곡으로 수천 곡 편곡 능력...연예계 진출할 뻔도?
“남들의 실력이 100% 고 제가 여기에 50~60%만 됐어도 저는 연극배우 같은 것을 했을 거예요. 10%도 안 되니깐 그쪽 일을 접었죠. 일례로 사람들이 저에게 노래를 한 번 시키고 나면 다시는 안 시켜요. 저는 ‘한곡을 수 천곡으로 편곡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니까요.(웃음) 그래서 최근 못다 이룬 꿈을 위해 국민대 종합예술대학원 영화학과 석사 학위를 땄어요. 그리고 사진에 대한 취미가 생겼고, 사진 찍는 기자들 폼이 너무 멋져 그들을 볼 때마다 제가 찍어주고 싶다는 역발상적 생각을 많이 하죠.”
김 위원장은 졸업할 무렵, 문화 쪽 길을 갈 수 없다는 판단에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노동운동에 관심이 적었고, 서클활동을 너무 열심히 한 덕에 진로가 불투명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 동기생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컸다고 말한다.
“동창들에게 ‘사회생활 겸 사법시험을 보려고 하는데 뭘 해야 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1차 8과목, 2차 8과목에 한 과목당 책을 세 번씩 봐야 된다’고 말하더군요. 그 친구에게 ‘지금부터 공부해서 되겠냐’고 물었더니 ‘할 수 있어’라는 대답이 떨어졌죠. 결국 그 친구 덕분에 고시공부를 시작하게 됐어요.”
친구 권유로 고시 공부…“책 두꺼워지기 전 합격해 천만다행!”
친구의 권유로 시작된 고시 공부를 김 위원장은 오기와 인내로 버텨냈다. 그 결과 2년 6개월여 만에 합격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이 때 고시에 합격하지 못했다면 고시를 포기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고시에 합격한 이후에 책이 두꺼워졌거든요. 그래서 더 이상 공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할 때쯤 합격한 거죠.”
김 위원장은 1988년 고시에 합격한 후 1989년 연수원 생활을 시작했다. 이미 이때는 민주화, 노동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임금은 올랐으나, 생활조건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는 게 김 위원장의 고백이다.
“수요와 공급, 통화량 등 경제 전체 속에서 노동 문제를 봐야 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죠. 당시 운동권 일에 관계하고 있던 이종걸 변호사(현 민주당 의원) 등 주변사람들에게 ‘경제 법학회’를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이곳에서 공정거래법, 소비자보호법 등을 공부했죠. 아마 지금도 공정거래법에 대해서는 절 따라올 사람이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YMCA 임대차 관련 소비자 상담, 경실련 입법위원, 참여연대 활동 등 시민단체 활동을 많이 했죠.”
법무법인을 만드는 등 변호사 생활이 안정되어갈 때 쯤 1995년 김 위원장에게 정치적인 제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 강삼재 신한국당 의의원이 김 의원을 만나 “정치권에 들어오라”고 제의했다. 그 자리에서 김 위원장은 “저에게도, 정치권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민운동 하겠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강삼재 의원 권유로 정계로 “2달만 있어달랬는데 벌써 10여년”
그러나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1996년 A사 기자가 찾아와 사진 한 컷 찍고 간 다음에 부대변인에 내정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강삼재 의원은 “일이 그렇게 됐으니, 두달만 가만히 있어달라”라고 당부해 이를 수락했고, 부대변인에 맞지 않은 특급대우를 받았다. 부대변인으로는 드물게 별도의 방이 나온 것은 물론 비서까지 붙여준 것이다. 뜻하지 않은 정치권 입문은 이렇게 시작됐다.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많아서 전국구 후순위에 올랐었죠. 그런데 청와대에서 앞 순위로 뺐더군요. 이른바 세대교체 때문이죠. 여성의 정치 참여, 전문가 정치 참여라는 목적 하에 20대 대표 이찬진 전 의원, 30대 대표로 제가 된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정치인이 돼서 두 달만 사무실에 조용히 앉아 있어주기로 한 게 벌써 10여년이 지났네요.(웃음)”
특히 10여년이 넘게 정치활동을 한 김 위원장은 초선시절 해외여행을 다녀본 적이 없었다. 국내에 있으나 해외에 있으나 다를 게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16대 전반기에 금배지를 달지 못해 난생처음 2년간 미국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그 동안 미국의 국력, 국방력 등은 인정하고 우리가 대응책을 세워야 된다는 인식을 하게 됐다. 특히 미국의 초일류 과학기술은 김 의원에게 놀라움을 던져 주었고 국회 상임위 중 비인기 상임위로 손꼽히는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를 선택하는 계기가 됐다.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는 어렵고 언론에 잘 노출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한 번 정도 거쳐 가는 곳이란 인식이 있죠. 저는 이곳에서 ‘한국의 발전 원동력이 어디 있느냐’를 꾸준히 탐색했어요. 그래서 16대 후반에 정계에 진출해 6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으로 활동했었죠.”
한국 정치의 폐단 중 하나는 자기 정치…“Public CEO가 돼야”
김 위원장은 정치권에 대한 쓴 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과거 정치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이미지 정치를 하고 있다 등등의 불만이었다.
“한국 정치의 폐단 중의 하나가 자기 정치를 지나치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10여년 넘게 정치에 몸 담은 경험에 의하면 이곳도 엄격히 일하는 곳이고, 업무가 있어요. 이른바 Public Business(공공 업무)죠. 예를 들면 각 집에 차가 있고 도로법, 교통신호 등을 어기면 처벌 법규 등을 만드는 것이에요. 따라서 국회의원들 개개인이 Public CEO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만 다양한 분야에 합리적인 생활공간을 마련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죠.”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국회의원이 왜 싸우냐고 비판을 많이 하는데, 심심해서 싸우는 것도 있지만 솔직히 판돈이 커서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에서 판돈이 제일 큰게 예산이잖아요. 어마어마한 예산을 일방적으로 쓰지 않고, 균형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싸우고 또 싸워야죠.국회의원, 의사, 변호사는 남의 고민과 일을 대신 해주는 사람입니다. 내일 같으면 양보하면되지만, 남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똑바르게 진료하고 진단해서 전문가 몫을 다해야죠. 싸우는 게 이상한 것 아닙니다."
밖에서 보는 것 보다 만나면 더 즐겁고 편안한 사람, 김영선 의원에게 끝으로 정치권에 나도는 경기지사 출마설을 물었다. 그는 "경기도의 비중을 고려하면 제가 단독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경기도에 새로운 산업을 일으켜 새롭고 참신한 경기도를 만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원문보기: http://www.sportsseoul.com/news2/ptoday/people/2009/0903/20090903101140200000000_739194597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