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시론]한상일/제대로 된 보수가 필요하다(국민대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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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6월 4일(월) - 동아일보 -
‘문민 정부’와‘국민의 정부’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서 ‘보수’는 개혁의 발목을 잡고 햇볕정책을 반대하는 ‘반개혁적’이고 ‘반통일적’인 수구기득권 집단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오랫동안 재야에서 활동해 온 진보적 급진세력이 권력권으로 진입하면서 집중적으로 보수를 공략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원인은 ‘이념’으로서의 보수가 ‘권력’으로서의 보수 속에 매몰되면서 보수세력이 그 정체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광복 후 상당기간 한국의 권력을 장악해온 중심세력은 보수주의를 근간으로 한 집단이었다. 남북 대치라는 국내상황과 냉전이라는 국제질서는 체제로서의 보수주의를 강화하는 데 더 유리한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장기간 권력을 지속하는 동안 보수주의는 스스로 권력화함으로써, 이념으로서의 보수의 사회성과 역사성을 포기하고 다만 권력유지를 위한 정치적 구호와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보수세력은 권력을 장악하거나 또는 권력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이념으로서의 보수를 정략적 차원에서 선거전략으로 이용하거나 그 본질을 왜곡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오늘도 우리 사회에서 정통 보수임을 자처하면서도 이념에 배치되는 권력을 향해 불나방처럼 몰려가고 있는 거짓 보수의 군상(群像)들이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대의 보수는 스스로를 반성하고 거듭나는 계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진보주의는 ‘개혁적’이고 보수주의는 ‘수구적’이라는 사회적 통념은 잘못된 것이다.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준거가 있을 수 있다. 그 준거의 하나로서 보수주의가 역사의 경험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면 진보주의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를 더 중요시하고, 보수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변혁을 지향한다면 진보는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한다 할 수 있다. 역사를 인간의 경험과 지혜의 퇴적(堆積)이라고 믿고 있는 보수주의는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 비교적 쉽게 변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것에 대한 신념과 판단 기준이 명확하다 할 수 있다. 물론 진보가 더 개혁적이고 보수가 덜 개혁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보주의가 이상적이고 급진적인 것에 반하여 보수주의가 현실적이고 점진적이기 때문일 뿐이다. 유럽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이 ‘중층적(重層的)’ 역사관을 바탕으로 한 진정한 보수주의는 끊임없이 사회변혁을 추구하고 있고, 그 방법과 속도를 검증된 역사의 경험에서 찾는다. 그러므로 급진적 개혁보다 덜 개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더 확실한 성공을 담보하고 있다. ‘국민의 정부’ 등장 이후 이념적으로나 정책적으로 진보적 급진개혁이 단연 주류를 이루고 있다. 모든 것은 개혁으로 통했고, 또한 개혁은 모든 사회적 가치를 압도해 왔다. 지난 총선 당시 ‘낙천 낙선운동’이 보여준 것과 같이 어떠한 초법적 행위도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진행될 때는 정당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집권당에서조차 ‘개혁 피로론’이 대두할 정도로 진보적 시각을 대변하는 국민의 정부식 급진적 개혁은 이미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의 지혜를 무시하고 검증을 거치지 않은 급진적 개혁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재벌개혁, 교육개혁, 의료개혁, 대북정책 등이 잘 설명해주고 있다. 모든 국민의 하루하루 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정책들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실험해 본 것이다. 그리고 그 실험의 차질과 실패로 인한 고통은 국민의 몫으로 돌아왔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념으로서의 보수와 실천으로서의 보수가 일치된 보수세력을 요구하고 있다. ‘온정적’이니 ‘개혁적’이니 하는 정치적 수사로서의 보수주의가 아니라, 스스로 권력화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점진적 사회 변혁을 실천할 수 있는 그러한 참(眞) 보수세력의 등장을 필요로 하고 있다. 한상일(국민대 교수·국제정치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