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편협 정치가 우리사회 ‘종교전쟁’으로 몰아가고 있다 / 김우석(행정대학원) 객원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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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석의 이인삼각> 문정부, 경제적 발전 견인한 ‘산업화세력’ 죄인 취급
지난 주말 광화문집회에서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말한 '지옥' 발언에 대해,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이 "국가 폄하이자 국민 모독"이라고 비판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일상적인 정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여권이 의도적으로 조장하고 있는 ‘종교갈등’이다. 여당 대변인은 "황 대표가… 스스로 구원자임을 자부하고자 한다면 종파를 창설할 일이지, 정치를 논할 일은 아니"라며 “국가와 국민을 지옥으로 몰아넣고, 십자형 레드카펫에서 메시아를 자처하는 한 편의 희비극"으로 했다. 이정도 되면 대놓고 한국 기독교인들을 욕보인 것이다. ‘지옥’은 기독교에서만 쓰는 용어가 아니다. 황 대표를 ‘편협한 종교인’으로 모는 정치적 의도가 없다면, 이정도 용어를 근거로 ‘구원자’, ‘십자’, ‘메시아’ 운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념갈등’에 특화된 이들이 해결이 더 어려운 ‘종교갈등’을 정쟁의 도구로 끌어 들이고 있다. 지금의 행태를 보면, ‘종교전쟁’으로 한국당을 고립시키고 총선에서 반사이익을 얻겠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 이런 분위기는 황교안 대표가 “부처님오신날 법요식”에서 ‘합장을 하지 않았다’며 진보매체가 포문을 열 때 감지가 됐다. 황 대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침례교회 전도사이기도 하다. 인간적으로는 큰 장점이다. 일반인에 비해 더욱 정직하고 착하게 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황 대표의 이미지는 ‘옳은 소리하는 바른사람’이다. 그런데, 복마전 정치판에 와서는 단점이 되기도 한다. 그를 노리는 위협적인 상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헌법적 가치인 ‘종교의 자유’는 필요할 때만 쓰는 장식품에 불과하다. 부처님오신날 법요식에 참석하는 것은 불교를 존중하고 그 종교를 믿는 국민들과 함께 하기 위함이다. 크리스찬인 그가 부처님을 마음으로 믿어서가 아니다. 이것은 속임수도 아니고 꼼수도 아니다. 상식적인 얘기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해당 사찰의 스님들이나 신도들도 반기며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현장에 있지도 않은 사람들이 정치적 이유에서 이를 ‘결례’라며 확대하며 분란의 소재로 삼았다. 소란이 벌어지자 조계종 내 진보조직인 종교평화위원회(종평위)가 나섰다. 종평위는 5월 22일 “황 대표가… 거대 정당의 대표로서, 지도자로서 참석한 것이 분명함에도 개인의 생각과 입장만을 고집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논란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종교에 집착하려면 정치지도자를 사퇴하라’고 압박했다. 이에 대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종교의 자유’를 강조하며 ‘불교 지도부의 좌경화’를 우려했다. 이쯤 되면 ‘종교전쟁’의 초입에 들어 선 분위기다. 정치가 해묵은 종교갈등을 들춰내 내전으로 이끌고 있다. 모든 종교전쟁은 그럴 듯한 명분에 근거해 시작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정치인들의 그릇된 욕심에서 비롯된다. 대표적인 종교전쟁인 ‘십자군전쟁’이 그랬고, 이슬람교내 순니파와 시아파간 전쟁이 그렇다. 모두 앞에서는 ‘성전(聖戰)’이라고 했지만, 들여다보면 치사한 ‘권력투쟁’일 뿐이다. 전쟁양상을 봐도 가장 추악한 전쟁이 종교전쟁이다. 참전자들은 상대를 ‘절대악’이자 ‘섬멸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어떤 악행도 비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구선진국은 종교전쟁의 폐해를 겪고 ‘종교의 세속화’를 이루었다. 지금은 ‘정교분리(政敎分離)’는 상식이 되었다. 수많은 피를 교훈삼아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바치는” 전통을 세운 것이다. 공식국가행사에서 찬송가를 부르기도 하지만, 이슬람에 대한 포용도 주장한다. 유럽은 종교의 세속화가 완성국면에 이르자 이념갈등에 몸살을 알았다. ‘유신론’끼리의 전쟁에서 ‘유신론’과 ‘무신론’의 전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럴 듯 한 명분이 있어도 모든 갈등과 전쟁은 사람들을 피폐하게 한다. 명분이 거창할수록 피해는 더 커지기 마련이다. 프랑스의 ‘똘레랑스(tolerantia 자기와 다른 종교·종파·신앙을 가진 사람의 입장과 권리를 용인(容認)하는 일)’는 이런 상황에서 사회를 통합하려는 지혜의 산물이다. 중국식으로 말하면 ‘구동존이(求同存異)’다. 다른 것은 다른 데로 두고 가능한 범위에서 함께 목표를 이루자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어떤가? 수많은 갈등이 압축적으로 몰려와 사회혼란을 고조시키고 있다. 사회통합의 중심이 되어야 할 정치는 오히려 갈등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념전쟁’, ‘역사전쟁’에 이어, 이제 궁극적 갈등인 ‘종교전쟁’으로 사회를 몰아가고 있다. 조선은 성리학(性理學) 국가였다. 성리학은 모든 원칙에 우선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다른 종교를 심하게 핍박하지 않았다. 비공식적으로지만 왕실이 불교를 믿기도 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을 침략했던 일본에 맞서 승병이 일어났다. 살생(殺生)을 금하는 절대교리를 깨고 말이다.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전통 때문이다. 일제 때는 기독교와 천도교가 ‘삼일운동’을 주도했다. 이런 종교가 없었다면, 그렇게 대규모의 비폭력 항쟁이 지속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나라 종교는 배타적이지 않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역사에서 서로 보완적으로 역할을 했다. 그것이 우리민족의 저력이고, 국가생존과 발전의 원동력이다. 모든 국가에서 종교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버드대학교 조지프 나이(Joseph S. Nye)교수의 분류로 보면, 종교는 국가를 지탱해 주는 대표적인 ‘소프트 파워(soft power)’다. 종교는 고대국가 형성에 핵심적 역할을 했고, 미래국가에도 그 못 지 않은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런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국가공동체를 해체하는 불씨로 활용한다면, 이는 ‘안보위기’, ‘경제위기’에 비할 수 없는 더 큰 위기를 자초하는 일이다. 여권은 역사에 죄를 짓고 있다. 그 정도에서 멈추지 않으면, 선거에서 ‘국민의 심판’뿐 아니라 ‘역사의 심판’도 받게 될 것이다. 글/김우석 (현)미래전략연구소 부소장·국민대 행정대학원 객원교수
출처: http://www.dailian.co.kr/news/view/798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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