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언론속의 국민

<소나무를 찾아서>(18)‘조선왕조 융성’염원담긴 生命樹 / 전영우(산림)교수


2003년 7월 4일(금) - 문화 -


독자라고 밝힌 몇몇 분이 전화와 인터넷으로 연락을 주셨다. 따지는 분도 계셨고, 은근히 부탁하는 분도 계셨다. 그 내용은 주로 우리 고장의 소나무 자랑과 지면에 소개 여부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인 내용은 서울에도, 경기도에도 소나무는 자라는 데 왜 충청도와 전라도와 경상도의 소나무만 소개하느냐는 힐난 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연재지면을 염두에 둔 독자의 관심과 애정 표현 이라고도 생각했지만 한편으론 일본과 금강산의 소나무까지 다루면서 서울과 경기도를 빠트린 필자의 무신경을 지적한 내용이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조임금과 인연이 있는 수원 노송지대로 향했다. 노송지대란 지지대(遲遲臺) 고개 정상으로부터 서울~수원간 국도 변에 낙락장송들이 자라고 있는 5km 구간을 일컫는다. 노송지대의 낙락장송은 조선시대 정조(1790년)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의 나무를 심는 관리(植木官)에게 1000 냥을 하사하여 국도변에 소나무 500그루를 심게 한 것에서 유래 되었다. 지지대란 지명 역시 정조의 화성행차 덕분에 생긴 지명 이다. 오늘날 수원시와 의왕시의 경계선에 해당되는 이 고개는 현륭원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장소였고,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이 지점에서 현륭원이 있는 남쪽을 자주 뒤돌아보며 행차를 지체시켰다고 전해지고 있다.
10차로로 뚫린 경수 산업도로를 벗어나 옛길의 정취를 간직하고 있는 노송지대를 아침 일찍 거닐어 본다. 210년 전, 수행원 1700 명과 800필의 말을 거느리고 창덕궁에서 화성에 이르는 45km의 거리를 이틀에 걸쳐 위풍당당하게 행차하던 정조를 그려보았다. 11행으로 열을 지어 정조를 수행했던 수많은 군사와 수행원들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면서, 당시로서는 넓은 길이었을 새로 낸 10m 폭의 시흥대로를 상상해봤다. 그리고 지지대 고개에서부터 길 양옆에 소나무를 심도록 명령한 정조의 의중을 헤아려봤다.

옛길을 거닐면서 머릿속에 펼쳐졌던 화성행차의 정취는 부슬비가 내리는 이른 아침임에도 일각을 다투는 승용차들의 질주 때문에 어느새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짧은 그 길을 긴 거리인 양 천천히 거닐면서 정조의 소나무들을 만났다. 200여년의 풍상을 이겨 내고 길옆에 버티고 선 50여그루의 소나무 모습은 각양각색이었다. 정조의 화성행차는 물론이고, 일제와 한국전쟁과 압축고도성 장기에 이 길을 이용했던 수많은 군상의 모습을 지켜봤을 소나무는 그러나 말이 없었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세종에 이어 다시 300년 만에 왕 조의 르네상스를 꽃피운 정조는 어떤 생각으로 길옆에 소나무를 심게 했을까. 하고많은 나무 중에 유독 소나무를 심은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소나무 식목을 명한 정조의 생각을 엿보고자 조선왕조실록을 뒤적였지만 식목관에게 왕실 내탕금(內帑金) 1000냥을 하사한 내용과 함께 나무 심기에 애쓴 사람에게 공로를 치하하고 감독 수령에게 상을 주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구체적인 답은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소나무와 관련된 700여회의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기록 중 많은 부분은 황장목, 조선재, 궁궐재의 확보 와 보호를 위한 내용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의외로 왕릉과 궁궐 주변에 소나무를 심고 가꾸었던 흔적들을 적지 않게 발 견할 수 있다.

왕릉과 궁궐 주변에 소나무를 특별히 중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소나무가 바로 조선왕조의 ‘생명의 나무(生命樹)’였기 때문은 아닐까.

소나무가 조선왕조의 생명수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흔적 은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 창경궁 명정전에 있는 ‘일월 곤륜도(日月崑崙圖)’에서도 엿볼 수 있다. 국사에 임했던 임금의 용상(龍床) 뒤편에 자리잡고 있는 ‘일월곤륜도’는 해와 달과 곤륜산을 주제로 그린 그림이다. 그림에 나타난 해와 달은 왕 과 왕비를 상징하고, 천하 제일의 성산(聖山)을 상징하는 곤륜산은 왕실의 존엄을 상징한다고 한다.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왕실의 존엄을 상징하는 이 그림 속에 수 많은 생명체 중에 오직 소나무만이 살아 있는 생물로 나타나고 있는 점이다. ‘천계(天界: 해와 달), 지계(地界: 산과 바다), 생물계(生物界: 소나무)에 존재하는 모든 신들의 보호를 받아 왕 실과 나라가 번창하라는 바람’을 나타낸 이 그림 속의 소나무는 왕조의 무궁한 번영을 상징한 생명수임을 상상할 수 있다. 소나무에 대한 이런 인식은 다른 곳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왕릉과 궁궐 주변에 항상 좋은 기운(吉氣)이 에워싸도록 소나무를 특히 많이 심게 했던 왕조실록의 기록들도 바로 소나무가 왕조의 생명수임을 방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은 그 흔적조차 스러지고 있지만, 소나무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곳곳에서 아름드 리로 자라고 있었고, 그 구체적인 내용은 1800년대 초에 제작된 ‘ 동궐도(東闕圖)’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소나무를 비보(裨補: 모자람을 채움) 목적으로 활용한 이러한 사례는 풍수지리사상이나 음양오행설에 뿌리를 둔 조상들의 자연관 을 반영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처럼 소나무는 바로 왕조의 무궁한 번영을 꾀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생명의 나무였다. 이런 생각을 정조의 소나무 식재에 대입하면 어떤 답을 얻을 수 있을까.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을 중핵 에 둔 사민국가(士民國家)를 확립하며, 농업과 상공업이 함께 발달하는 근대국가를 추구했던 정조가 그 꿈을 성취하고자 화성가 도에 왕조의 생명수인 소나무를 심게 했던 것은 아닐까. 특히 화성은 정조자신이 건설했던 황제의 직할도시이자 자급자족하는 낙원 도시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왜 조선왕조는 소나무를 생명수로 상정했을까. 조선왕조는 국가의 통치철학을 법치보다는 덕치를 우선하는 왕도 정치를 지향했다. 왕도 정치는 명분과 의리를 밝혀 국민을 설득 하고 포용하는 정치로, 그 뿌리는 유학(성리학)에 두고 있다. 소나무는 명분과 의리를 상징하는 지조와 절개와 충절과 기상을 나 타내는 나무로 국민들의 가슴속에 각인되었고, 그런 상징성을 ??逵?더불어 시대정신으로 반영하고자 조선왕조는 소나무를 이용했던 것은 아닐까. 소나무는 민초들의 생명수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우리 어머니들 은 솔잎을 가르는 장엄한 바람 소리를 태아에게 들려주면서 시기와 증오, 원한을 가라앉히고자 솔밭에 정좌하여 태교를 실천했다 .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들은 사철 변치 않는 늘 푸름과 청정한 기상의 강인한 생명력을 본받아 지조·절조·절개와 같은 소나무 의 덕목을 머릿속에 심어주었다. 따라서 소나무는 왕실뿐만 아니 라 바로 한민족 모두의 생명수였던 셈이다.

전영우 국민대 교수(산림자원학) ychun@kookmi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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