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언론속의 국민

전영우(산림)교수 문화일보 소나무를 찾아서 연재 마쳐


2003년 7월 21일(월) - 문화 -


<소나무를 찾아서>몇백년만에 되살아난 솔숲의 풍류


대관령 솔숲에서 평생을 한 분야에 헌신한 전문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산림공직자로서의 보람을 설파한 산림청 조연환 차장과 궁궐재로서의 소나무 가치를 강조한 신응수 도편수의 이야기는 진솔했다. 우리 숲을 만들고 가꾸는데 젊음을 다 바친 공직자나 한평생 베어낸 소나무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 한 대목장의 이야기를 듣는 참석자들은 일순 숙연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숲의 모습이, 우리 소나무의 가치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들이 바로 우리 숲과 우리 소나무의 산증인이 아니겠는가. 마지막 행사는 서울대 이애주(무용) 교수의 몫이었다. 한복으로 채비를 한 이교수는 천지의 기를 먼저 불러모았다. 오장에서 울려나온 오행음(五行音)은 하늘도 땅도 감응시키는 듯했다. 금방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대관령 의 궂은 하늘도 일순 맑아졌다. 그리고 세찬 골바람도 어느새 잠 잠해졌다. 앉은 자세로 천천히 두 팔만 움직이던 이교수의 조용한 춤사위는 어느 순간에 큰 동작으로 변했다. 두 손에 쥔 솔가지도 한 몸처럼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땅 바닥에 바짝 낮 춘 몸이 하늘로 솟구칠 때는 모두 숨을 죽였다. 한바탕 신명 끝에 ‘솔바람 춤’은 마침내 끝났다. 나의 눈에는 이교수도 참석자 들도 어느 틈에 모두 소나무로 변해 있었다. 춤꾼도 관객도 모두 대관령의 금강소나무처럼 멋진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지난달 15∼16일 양일간 40명의 일행이 ‘소나무를 찾아서’ 나선 걸음은 대관령 휴양림의 소나무 숲에서 이교수의 ‘솔바람 춤 ’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지난 반년 동안 이 땅의 소나무를 찾아 나선 나와 이호신 화백의 행복한 여정도 이 행사와 더불어 끝을 맺었다.

‘소나무를 찾아서’는 우연한 인연으로 시작되었다. 작년 8월 경북 봉화의 춘양초등학교 총동창회는 ‘춘양목 문화축제’를 개최하면서 ‘춘양목의 문화적 가치’에 대한 특강을 나에게 부탁 했다. 평소 춘양목의 멋진 모습을 화폭에 담길 원했던 이화백은 춘양 걸음에 동행을 원했고, 소나무는 왕복 12시간이 소요된 자동차 여행에 신선한 청량제였다. 이 땅 곳곳의 소나무를 글과 그림 으로 소개하자는 엉뚱한 계획은 지루한 귀경길에 그 구체적 형태를 갖추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대미를 장식한 소나무 기행행사도 그랬다. 연재가 진행됨에 따라 꽤 많은 이들이 소나무를 찾아나서는 우리와 동행을 원했다. 그러나 번번이 일정을 맞추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우리 소나무의 아름다움을 많은 이들이 공유할 수 있게 대표적 솔숲을 선정하여 함께 나서자는 안이었다. 그리고 이왕 소나무를 찾아 나설 양이면, 조선시대 옛 그림에 나타난 문사들의 소나무 풍류를 21세기에 한번 재현해 보자는 생각도 들었다. 각자의 호주머니를 털어 여행경비를 충당하리라는 우리의 처음 계획은 산림청의 지원으로 문화예술인의 소나무 축제로 승화되었다.

선비정신의 표상을 간직하고 있는 경북 영주 소수서원의 솔밭이 우리들의 첫 기행지였다. 영주의 소백 예다회 회원들이 정성스럽 게 준비한 다회(茶會)는 뜻밖이었다. 아름드리 낙락장송 아래서 작설차와 함께 맛보는 송화다식은 유별났고, 그 운치도 각별했다 . 먼저 소수서원 소나무 이야기를 박석홍 선생으로부터 들었다. 그리고 이동희(서울대 대학원·국악)씨의 가야금 연주가 이어졌다. 12줄에서 울려 퍼지는 황병기 선생의 ‘숲’은 솔숲과 잘 어울리는 천년의 소리였다.

김양동(계명대) 교수와 조수현(원광대) 교수의 현장 휘호가 이어 질 때 이영복 화백과 이호신 화백은 솔숲에서 벌어지는 아름다운 정경을 화폭에 담았다. 가야금 소리와 묵향과 수묵의 색이 하나의 하모니로 승화되는 솔숲의 현장은 정겨웠고 뜻깊었다. 소수서 원 솔밭 위를 지나는 바람소리 탓인지 몰라도 소나무 아래서 한 때를 즐기던 18세기 조선의 문사들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소나무를 즐길 줄 아는 시인 묵객들의 현대판 풍류에 소수서원의 소나 무도 그 기쁨을 함께 즐기는 듯했다. 몇백년만에 되살아난 소나무 아래의 풍류가 아닌가.

두번째 기행지는 처진 소나무가 500년째 터 잡아 살고 있는 경북 청도 운문사였다. 제 스스로 몸을 낮춤으로써 더욱 존경과 사랑 을 받는 처진 소나무의 겸양지덕을 설파하는 진광 스님의 말씀은 맑았다. 더불어 금남(禁男)의 집인 청풍료(淸風寮)가 우리 일행 에게 개방된 사실이나, 학장스님·교수스님과 함께 250여 학인 병 모시고 우리 문화 속에 자리잡은 소나무의 가치를 논할 기회를 얻었던 일은 평생 기억해야 할 사건이었다. 4년 교육을 수료하면 이 땅 곳곳의 산천에서 소나무와 함께 살아갈 비구니 스 님들이 아니던가.

다음날 아침 일찍 길을 나선 우리들은 마침내 소나무와 하나가 되는 경험을 했다. 우리 일행을 맞아주는 안개 속의 대관령 소나무들은 당당했다. 이 솔숲을 처음 대면했던 지난 겨울 여정이 떠 올랐다. 나도 이화백도 비탈에 선 소나무와 함께 대관령을 넘어 오던 세찬 북서풍에 온몸으로 맞섰던 순간이 생각났다. 어느 나무 한 그루도 굽힘 없이 당당한 그 모습에 감격했던 희열의 순간이 되살아났다. 우리 소나무의 참모습을 옳게 서술할 수 있게 힘을 주십사고 간절히 갈구했던 그 염원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 올랐다. 용기와 희망이 절실히 필요한 곤궁했던 세월에 소나무가 안겨준 불가사의한 치유력은 얼마나 신묘했던가.

지기(地氣)와 천기(天氣)로 응축된 금강소나무들이 옹립해 있는 숲길을 거닐면서 박희진 선생의 시 ‘강송(剛松) 찬미’ 한 구절 이 생각났다. “강송의 숲에는 일체 잡념을 버려야 한다. 오직 자연에의 외경(畏敬) 하나로 마음을 채우도록. 강송을 본떠 허리를 편 다음 가슴을 열고 심호흡 해야 한다. 뿌리를 깊숙이 대지 에 내렸기에 확고부동한 긍정의 자세와 찬미의 정성을 배워야 한다. 온갖 협잡의 유혹을 물리치고 상승일념의 집중과 지속력, 그 드높은 기개의 도덕성도.”

박선생의 시를 가만히 읊조리면서 나는 행복했다. (우리 소나무 에 대한 더 이상의 찬사가 있겠는가. 그리고 소나무에 대한 시인의 예지력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리고 지난 10년 세월을 기다 리면서 우리 소나무에 쏟았던 ‘긍정의 자세와 찬미의 정성’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1993년 대관령 휴양림에서 개최된 소나무 학술토론회 이후 한순간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 바로 소나무다. ‘소나무를 찾아서’를 통해서 우리 소나무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애정이 이웃으로 확산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성원과 관심을 아낌없이 쏟아준 독자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끝〉

국민대 교수(산림자원학) ychun@kookmi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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