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언론속의 국민

[자연과 삶]전영우(산림)/‘나무 할배’의 가르침
2004년 03월 22일 (월) 19:36


남녘에서 꽃 소식이 들려오면 북한산 자락의 버드나무 줄기에 물이 오른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나무들은 더 이상 꽃샘추위가 없음을 용하게도 아는 눈치다.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 오르는 꽃눈과 부드러운 연두색으로 변하는 잎눈을 지켜볼 양이면 식물의 계절 감지능력에 탄복할 수밖에 없다.

이때쯤이면 ‘나무 할배’는 어김없이 전화를 주셨다. 먼저 올해는 어떤 나무를 몇 그루 심고 싶다는 계획을 들려주면서 ‘나무 선생’의 의견을 묻곤 하셨다. 간혹 시중에서 살 수 없는 독특한 나무를 구하는 방법에 대해 묻기도 했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야기는 작년, 재작년에 심었던 나무들의 근황에 대한 설명이었다.

이렇게 맺어진 인연은 나무 심는 계절뿐 아니라 연중 수시로 나무 이야기를 서로에게 스스럼없이 들려주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여든이 넘은 나무 할배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책 읽고 글을 썼다. 주경야독의 생활을 그대로 실천하던 나무 할배의 감수성은 머릿속으로만 자연을 그리워하는 도회 사람과는 달랐다. 특히 나무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관심과 애정은 나무 선생조차 감히 넘볼 수 없을 어떤 경지에 이른 상태였다.

나무 선생은 할배가 전해주는 소식으로 계절의 변화를 남 먼저 느꼈다. 겨울을 이겨내고 삼월 초 노란 꽃을 피운 산수유의 청초함을 들려주던 나무 할배의 은근한 음성은 봄의 전령이었고, 유월에 이어 칠월에도 계속 꽃을 피운 함박꽃의 아름다움을 혼자 보기 아깝다면서 꼭두새벽에 전화를 주실 때쯤이면 여름이 한창임을 깨달았다.

칠십 년 묵은 이팝나무가 피워낸 큰 꽃 무더기를 본 감격이 얼마나 컸던지 할배의 음성은 떨리기조차 했다. 겨울에 피는 동백꽃과 닮아서 하동백(夏冬柏)이라고도 부르는 노각나무가 꽃을 피웠을 때는 슬며시 당신의 지식을 자랑하기까지 했다. 일곱 종류의 노각나무가 세계 곳곳에 자라고 있지만 동백 비슷한 꽃을 피우는 우리 노각나무가 가장 아름다운데, 그 꽃을 본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 나무 선생은 그저 부끄러웠을 뿐이다.

세월이 지나고서야 나무 선생은 할배의 이야기에서 오히려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됐다. 할배의 나무 이야기가 단순히 절기의 변화만 알려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과 소통하고 자연에 몰입하는 방법을 일러준 것임을 느낀 것이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변하는 나무의 아름다움을 전해준 할배의 술회는 과학과 기술에 의존해 나무를 이해해 왔던 나무 선생에게 귀한 가르침이었다. 산림학 교수란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작 산과 숲의 참된 의미를 제대로 담지 못하는 나무 선생에게 자연이 간직한 영성의 가치를 일깨워준 준엄한 채찍이었다.

다시 나무 심는 계절이 돌아왔다. 나무 할배의 음성이 새삼 그리워진다. 나무 할배는 경북 봉화에서 농사짓는 철학자로 알려진 전우익 선생의 별명이다. 세상살이의 이치는 크고 허황한 것이 아니며 흔히 간과하는 우리 주변의 작은 생명체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진정한 농사꾼의 질박한 삶을 통해 몸소 보여주시던 할배가 그립다.

전영우 국민대 교수·산림자원학

○약력:1951년 생. 미국 아이오와주립대 산림생물학 박사. 저술 활동과 ‘아름다운 숲 찾아가기’ 행사로 숲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알리고 있다. 저서는 ‘숲 보기 읽기 담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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