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홍성걸의 새론새평] 어느 보수주의자의 눈으로 본 5·18 / 홍성걸(행정학과)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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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유신체제 말기 대학에 입학한 나는 시위 구호와 최루탄이 난무하던 시기를 보냈다. 법학통론과 헌법 과목을 처음 접하면서 대통령 긴급조치권과 국회의원 3분의 1 지명권, 7년 임기에 중임제한도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대통령제를 규정한 헌법이 법 같지도 않아 울분을 토했던 기억이 아련하다. 10·26으로 유신체제가 무너진 후 1980년의 봄을 만끽하던 우리는 신군부의 정권 찬탈에 반대해 다시 시위 속에 몸을 실었다. 5월 중순, 서울 시내는 민주화를 외치는 대학생의 집단시위 속에 최루탄과 돌멩이가 난무했고 곳곳에서 시위대와 진압경찰 간 충돌로 많은 학생들이 다쳤다. 5월 15일에 절정을 이루었던 시위가 소강 상태에 접어들던 17일, 갑자기 계엄령의 전국 확대가 발동되었다. 이때 광주에서는 민간인을 향한 발포와 무력 진압으로 차마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대다수 학생들은 까맣게 몰랐었다. 1980년 5월 광주는 문자 그대로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그곳이 대한민국이었다면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군이 국민인 광주시민을 그토록 참혹하게 짓밟을 수는 없는 일이다. 당시 광주 시민을 향한 신군부의 무력 진압은 있을 수 없는 명백한 국가 폭력이었고, 그 진상을 낱낱이 밝혀 역사에 기록을 남기는 것은 우리 세대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진상조사와 처벌, 그리고 희생자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졌지만, 아직 밝히지 못한 사실이 있다면 철저한 진상조사를 통해 사실을 반드시 밝혀야 한다. 필자는 문재인 정부가 하려는 진상조사에 당연히 동의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보수와 진보의 입장이 다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마침 그동안 비밀로 분류되었던 미국 측의 많은 기록이 해제되었으니 사실관계를 밝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다. 대통령의 말처럼 처벌을 위한 조사가 아니라 역사를 바르게 전하기 위한 기록 차원에서라도 진상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다만 보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조사를 위해서 몇 가지 기준과 원칙이 필요하다. 먼저 진상조사는 모든 선입견과 감정을 배제한 상태에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관계를 밝히는 데 주력해야 한다. 현재 찾고자 하는 발포 명령 책임자의 경우, 명령자가 있었다는 전제로 접근하기보다 당시의 상황적 증거와 가용 자료들, 그리고 명확한 사실관계 증언들을 바탕으로 찾되, 밝히지 못한다면 후세에 확인될 수 있도록 증거를 남겨두어야 한다. 계엄군으로 동원되어 진압을 담당했던 군인들도 가해자의 시각만이 아니라 그들도 피해자일 수 있다는 시각에서 접근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수의 진압 군인들은 병역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군에 입대한 우리의 자식이요 형제였다. 그들은 명령에 따라 진압작전에 투입되어 평생을 죄의식 속에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진압에 동원된 장병들 중에서도 사망자가 속출했었다. 그들도 국민이다. 이렇게 접근할 때, 비로소 당시 진압군 입장에서 현장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 앞에서 진실을 증언할 용기를 갖게 될 것이다. 끝으로 일각에서 주장하는 5·18 정신의 헌법 전문 포함 문제는 대통령의 지시나 생각이 아니라 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수많은 중요 사건이나 운동 중 오직 3·1운동과 4·19만 포함되었고, 거기에는 뚜렷한 논리적 근거가 있다. 3·1운동은 임시정부 설립을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을 선포하였기에 그 법통을 계승한다는 의미이다. 4·19 민주항쟁은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 3·15 부정선거와 독재를 타도하고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세우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대표적 민주이념으로 헌법 전문에 포함된 것이다. 5·18은 민주항쟁이지만 본질적으로 광주 지역에 국한된 국가 폭력에 의해 무고한 시민이 희생된 사건이다. 그래서 3·1운동이나 4·19정신과 같은 반열에 둘 수 없다. 만일 5·18이 포함되어야 한다면 과거 일제강점하에서 일본의 압제에 항거했던 광주학생운동이나 광복 직후 공산주의를 부정하고 일어섰던 신의주 학생의거 등 모든 지역적 저항들도 헌법 전문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제주 4·3도 마찬가지다. 5·18 광주민주항쟁은 보수와 진보라는 가치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없는 우리의 아픈 역사이다. 보다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그리고 광범위한 진실 규명을 통해 화해와 통합의 새 출발을 이루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원문보기: https://news.imaeil.com/Satirical/2020051817024772110 ※ 게재한 콘텐츠(기사)는 언론사에 기고한 개인의 저작물로 국민대학교의 견해가 아님을 안내합니다. ※ 이 기사는 '뉴스콘텐츠 저작권 계약'으로 저작권을 확보하여 게재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