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책과 디자인 / 모더니스트들의 도시 서정 / 조현신(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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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절친 모더니스트의 대조 어법 이상이 디자인한 김기림의 시집 『기상도』(1936) 구본웅이 디자인한 임화의 시집 『현해탄』(1938) 김기림의 시집 『기상도』(자가본, 1936)는 그의 친구이자 후배인 이상이 디자인한 것으로 초 모던 감각을 보여준다. 표지 전면을 은색과 검은색의 수직선이 가르고 있으며, 책 제목은 하단 좌편에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어 읽기가 불편하다. 이 디자인은 김기림에 의해 “검은 바탕에 은하를 상징하는 두 줄의 툭한 은하를 감은 호화로운 때때”라고 소개됐다. 이 설명은 이상의 마지막 소설 『종생기』(1937)의 한 대목을 환기시킨다. 이 소설에서 그는 “나는 왜 미끈하게 솟아 있는 근대 건축의 위용을 보면서 먼저 철근 철골, 시멘트와 세사(細沙), 이것부터 선뜩하니 감응하느냐는 말이다”라면서 자신의 감각을 검열하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 “이 익애의, 이 도취의… 굴레를 제발 좀 벗고 근량 나가는 인간”(김기림에게 쓴 편지, 1937년 10월경)이 되고 싶다고 쓴다. 그의 이런 고백에 비추어본다면, 먼 하늘의 별무리가 평안한 수평선으로 표현되지 못하고 긴장과 불안의 수직선으로 표현된 것은 근대도시 물성에서 매혹을 느끼는 식민 지식인의 양면적 서정성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정이 다가온다. 표제지 또한 그의 아방가르드적 모습을 잘 보여준다. 표제지는 3장인데 백지에 크기가 점차 확대되는 제목을 같은 위치에 배치해 확대되면서 커지는 운동성을 보여준다. 이 3개의 ‘기상도’는 항해, 철골, 거대 선박 등이 등장하는 시의 내용을 파노라마로 운율화한 시각시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은 당시 서구의 다다나 미래주의자들이 수없이 발표한 도형과 문자의 배합, 글자의 크기를 변형한 시각시를 잡지 『조선과 건축』에 기고했는데, 이 표제지 역시 그의 이러한 실험성을 보여준다. 시인이자 평론가인 임화의 시집 『현해탄』(동광사, 1938)은 이상의 단짝인 구본웅이 디자인한 것이다. 이 시는 “이 바다물결은 예부터 높다… 이곳에 태평양 바다 거센 물결과 남진해온 대륙의 북풍이 마주친다”라고 시작되면서 현해탄이 지닌 침략의 험난한 역사와 그곳을 건너가는 조선 젊은이들의 운명을 노래하고 있다. 휘몰아치는 물결로만 만족할 수 없어 대륙의 상공에도 더 이상 격할 수 없는 폭풍을 띄워놓았다. 먹으로만 그려진 이 표지는 그가 그린 이상의 초상화 〈우인상〉의 붉은색 입술과 흰색 얼굴 못지않게 강렬하여 “진실한 생각은 뛰어나서 오채를 귀히 여기지 않는다”는 동양적 필법기까지 연상시킨다. 이렇게 절친으로 지냈던 두 예술가의 작품은 근대기 격동적인 감성을 극도의 절제와 격한 분출이라는 대조적 방식으로 표현했지만, 당대에 만연하던 울긋불긋한 색채는 동시에 버리고, 무채색의 도시 서정을 구사하고 있다. ‘틀을 돌파하는 미술’로 다가가기 정현웅이 디자인한 박태원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8) 디자인은 대중에게 다가가는 근거를 지닌 행위이다. 북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해석을 통해 문자 세계에 색채와 형상, 물성을 부여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자연히 언어가 지시하는 방향성 없는 기의에 물질적 상상력을 제공하면서 독자에게 확장된 감각을 부여한다. 독자는 표지 디자인과의 조우를 통해 그 책의 텍스트가 지닌 다층적인 묵시성을 순간적으로 넘어선다. 이런 면에서 근대기의 가장 전문적인 디자인 의식을 지닌 디자이너이자 화가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은 정현웅일 것이다. 그는 인쇄미술을 ‘틀을 돌파하는 미술’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종래의 그림이 액자에 그림을 넣어 갇힌 채 교류하는 틀의 미술이라고 한다면, 인쇄미술은 새로운 기술에 맞는 시대성과 대중성, 공리성을 지닌 새로운 예술 방식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정현웅은 또 한 명의 모던 댄디스트이던 박태원의 소설을 이러한 작품 논리로 형상화하고 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문장사, 1938)을 보자. 모든 색을 다 품은 검은 바탕에 음각으로 제시된 이 제목은 원고지라는 기표 안에 숨겨진 구보씨의 기록을 타이포그래피만을 통해 전달한다. 원고지의 네모 칸에 묶인 음절들은 그 단절성이 형성하는 리듬을 타고 독자에게 다가간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산책자, 기록자 구보씨의 하루를 전달하는 이미지 없는 이미지 문자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면서 뒤표지의 원고지 여백에까지 이르러 그 역할이 끝난다. 안회남의 소설 『불』(을유문화사, 1947)에서도 타이포그래피가 주는 물질적 상상력의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올리려 한 시도를 볼 수 있다. 판화로 표현된 탄광촌의 목조건물이 환유하는 ‘붉은 불’과의 조응성, 표제지의 칼 선이 드러나는 나뭇등걸의 ‘녹색 불’은 색채의 시각성과 함께 촉각성까지 인화하는 문자 이미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표지의 목조 건물이 지녔을 나무의 디테일한 질감을 표제지의 푸른 불과 배치한 것 역시 시각적 물화가 독자에게 주는 감각의 확장이다. 낯선 세계, 새로운 어법
김철수의 시집 『추풍령』(산호장, 1949) 표지는 어느 문화권에서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이며 원형적인 형상에 호소한다. 또한 모든 것을 품은 여백이거나, 아예 무의미한 배경으로 해석되는 흰색 공간이 특징으로 다가온다. 이미지즘의 대가인 장만영이 디자인하고 출판한 것으로 책의 왼편 상부에 반달형의 조개가, 뒤표지 제일 끝 대각선으로 별 형상의 불가사리가 배치되어 있다. 시의 전문은 “서녘 바람에 떠가는 구름이어라, 소리치면 돌아오는 고향이어라”로 매우 짧다. 이 시에 비추어볼 때 이 텅 빈 여백의 해석은 두 구절 속에서 흐르는 그리움을 귀퉁이에 오도카니 놓인 두 오브제 간의 거리감으로 해석할 것인지, 아닌지로 귀결된다. 이들이 품고 있는 짙고 까만 그림자의 복합적인 뉘앙스에 대한 해석 역시 독자의 몫이다. ‘남만서고’를 운영한 오장환의 시집 『성벽』(아문각, 1947)에서는 거친 물성이 느껴진다. “이중섭이 남으로 왔고 최재덕이 북으로 갔으니 비겼다”는 평을 듣는 월북화가 최재덕이 디자인한 것으로 “성벽은 편협한 야심처럼 검고 빽빽하거니… 인제는 이끼와 등넝쿨이 서로 엉키어 면도 않은 턱어리처럼 지저분하도다”라는 시 내용을 마티에르의 촉각성으로 치환했다. 하지만 내지에 화사한 한지, 깔끔한 풍경과 꽃의 판화를 붙임으로 거친 이미지를 무화시킨 것은 최재덕의 화풍이 보여주는 단정한 모던 미학의 연속선이다. 모윤숙의 시집 『빛나는 제국』(1933) 나도향의 소설 『환희』(1923) 김경린이 디자인한 『바다와 육체』(1948) 모윤숙의 시집 『빛나는 제국』(조선창문출판사, 1933)은 아르데코 감각을 보여준다. 아르데코 양식은 곡선의 아르누보 양식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을 즈음 그 곡선이 자르는 듯한 기하학적 도형으로 변하고 도시성의 금색과 은색, 검은색이 더해지면서 탄생한 양식이다. 창공과 별, 파도와 갈매기가 검은색의 형압으로 또렷이 도안화되어 있으며, 금빛 제목이 수직으로 새겨져 있다. 이렇게 딱 떨어지는 기하학적 형상은 대부분 일본적 취향을 시사하는데, 한옥 지붕의 처마가 품고 있는 곡선과 일본 전통가옥 지붕의 반듯한 선을 비교해보면 자연스레 이해된다. 이 외에도 낯설게 다가오는 세계를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양식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은 창조적 본능을 지닌 작가들에게는 당연한 욕구였을 것이다. 나도향의 소설 『환희』(조선도서주식회사, 1923)의 아치도형과 중간 톤의 붉은 색감, 김경린이 디자인한 『바다와 육체』(평범사, 1948)는 기하학적 도형과 불가해한 삽화의 결합으로 도시 서정의 일면을 잘 드러낸다. 책의 내용에 따라 다양하게 모던성을 표출하던 이런 표지는 1950년대 이후 서구에서 유학한 화가들, 유명 대가들의 작품으로 덮이면서 그들의 화풍에 편승한 북 디자인이 활발해진다.
조현신 현재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대학원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친근하고 낯익은 한국 디자인 역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근대기에 형성된 한국적 정서의 디자인 표현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일상과 감각의 한국디자인 문화사>(글항아리, 2018)를 출간했다
원문보기: https://blog.naver.com/todayslibrary/221945194282 ※ 게재한 콘텐츠(기사)는 언론사에 기고한 개인의 저작물로 국민대학교의 견해가 아님을 안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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