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임정 파수꾼’ 동암 차리석을 아십니까 / 차리석평전 쓴 장석흥(국사)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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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5-09-12 17:57] 해방을 맞아 조국으로 돌아온 백범 김구가 취한 조치 가운데 하나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순국한 동지들의 유해를 봉환한 일이었다. 1946년 일본에서 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유골을 봉환, 효창원에 봉안한 백범은 48년 중국에 묻힌 동암 차리석과 석오 이동녕의 유해를 모셔왔다. 석오와 동암의 장례는 9월22일 서울 휘문중학교에서 이시영 부통령, 이범석 국무총리, 신익희 국회의장 등 정부요인이 참석한 가운데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장례에 앞서 3개월이 넘도록 석오의 유해는 유족의 집에, 그리고 동암은 백범의 숙소인 경교장에 안치됐다. 동암의 유해가 경교장에 안치된 것은 서북 출신인 동암에게 서울에 연고가 없는 이유도 있지만, 백범이 누구 못지 않게 아낀 후배 동지였기 때문이다. 백범이 중국내 독립운동가 중에서 가장 먼저 챙겼던 석오 이동녕(1869~1940)과 동암 차리석(1881~1945). 임시정부 국무총리와 의정원 원장을 역임한 석오 이동녕은 어느 정도 알려진 인물이다. 반면 동암은 낯설다. 평생을 임시정부에 몸담으면서도 이렇다할 ‘고관대직’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정에서 그가 맡은 직책은 임정 비서장과 국무위원 정도. 그러나 임시정부에서 동암의 존재는 이동녕 이상이다. 임정 수립에서 해방까지 27년간 임정을 떠나지 않고 임정의 살림을 도맡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정 요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그를 ‘임시정부의 파수꾼’이라고 불렀다. 동암 차리석은 1881년 평남 영원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평양 숭실학당에서 신학문을 익힌 동암은 학교 시절 독립협회 평양지회에 출입하며 조국의 현실에 눈을 떴다.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도산 안창호의 영향 때문이었다. 1907년 도산을 만나 신민회 창건에 동참한 동암은 평양 대성학교 설립과 청년학우회 핵심인사로 활동하다 1911년 ‘신민회 사건’으로 3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3·1운동이 일어나고 중국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동암은 1919년 여름 상해 망명을 결행한다. 상해에서 동암은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하는 한편 1948년 9월 22일 서울 휘문중학교에서 거행된 이동녕 및 차리석의 사회장 모습.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지방선전부의 이사로 일했다. 1923년 임시정부의 역할 및 방향 재정립을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정파간의 대립으로 결렬되자 동암은 한때 임시정부를 떠나 도산과 함께 흥사단 사업과 교육운동에 매진했다. 1930년 임시정부에 복귀해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된 동암은 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유랑길에 접어들자 임정 수호에 나선다. 당시 임정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가흥, 남경, 장사, 광주, 유주, 기강 등을 떠돌며 명맥을 유지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동암은 이 시기 의정원 부의장으로서 때로는 의장 대리를 맡고, 국무위원을 겸하면서 누란의 위기에서 임정을 이끌어갔다. 1940년 기강에서 중경으로 이전하면서 임정은 비로소 정부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동암은 대한민국임시헌장을 통과시키며 주석의 권한을 강화하는 한편 의정원의 기능을 크게 확대시켰다. 중경 시절 김구 주석이 강력한 지도체제를 확립하고 ‘독립운동의 대부’로 등장하기까지에는 동암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임시정부의 파수꾼이었던 동암은 임정의 최고지도자였던 도산과 백범을 측근에서 도왔다. 특히 1932년 도산이 일제에 체포되었을 때 동암이 쓴 ‘도산선생 약사’는 도산에 대한 최초의 전기로 평가받는 자료다. 동암은 해방 직후 김구 등과 함께 임정의 환국을 준비하던 중 48년 9월9일 중경에서 과로로 숨졌다. 동암은 임정 지킴이로서 생애를 임시정부에 헌신했지만, 항상 2인자였던 탓에 역사에서 묻혀 있었다. 변변한 연구 논문 한편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음지의 독립운동가’ 차리석을 임정 독립운동의 핵심 인사로 끌어올린 이는 장석흥 국민대 교수. 그는 최근 동암 관련 자료를 모아 ‘임시정부 버팀목 차리석 평전’(역사공간)을 출간했다. 평전 출간과 함께 서거 60주년을 맞아 지난 9일 백범기념관에서는 장례식 이후 처음으로 독립유공자, 학자 등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추모제가 열렸다. 임시정부의 만년 2인자였던 동암의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가 60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조운찬기자 sidol@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