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자연물 그 자체를 재료로 … 캔버스에 우주를 담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 김한들(행정대학원) 겸임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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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미술의 발상지 대구 얼마 전 광화문에서 반가운 만남이 있었다. 미국에 사는 지인이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한국을 처음 와본다는 그는 설레 보였다. 맨해튼에서 주로 생활하기에 서울의 규모에 꽤 놀라기도 했다. 그래서 그 넓은 서울에서 가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러자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가 가보고 싶은 곳은 서울의 어디가 아니라 대구였다. 생각해 보니 같은 미술 일을 하기에 그럴 법했다. 해외 미술 행사를 다니다 보면 한국 관람객을 종종 마주친다. 그리고 대구 사람들은 그중 꽤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이야기를 잠시만 나누어도 미술에 대한 깊은 지식과 진지한 태도가 느껴진다. 한국 근대미술의 발상지로 여기는 도시이기에 관심이 높은 것으로 생각한다. 지인에게 대구는 꽤 궁금한 곳이었을 것이다. 대구는 일찍부터 ‘화단의 천재’라고 불리는 인물들의 출생지였다. 근대에는 그 시기를 대표하는 이인성, 이쾌대가 등장했다. 1950년대에는 정점식을 중심으로 자생적으로 모더니즘 운동을 일으켰다. 1970년대에는 박현기, 이강소 등이 행위미술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결국 대구는 세대를 거쳐 한국 미술에 영향을 미친 특별한 도시다. 이 도시 출신의 훌륭한 작가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곽인식(1919~1988)이다. 한강 소설집 ‘노랑무늬 영원’의 표지작품으로 대중에게 알려지기도 했다. 그는 1960~70년대 한국과 일본의 현대미술 운동에 커다란 자극을 준 인물로 일컫는다. 그런데도 그의 작품 성과는 최근까지 저평가받아 왔다고 여긴다. 아마 재일 한국인이라는 특수성이 한몫했을 것이다.
#대구 출신의 현대미술 선구자 곽인식 곽인식은 1919년 경북 달성군, 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곽씨가 집성촌을 이루는 한 마을에서 만석꾼의 아들로 유년기를 보냈다. 교육사업에 힘쓰던 친가와 문인화가 정안복이 있는 외가와 가까이하며 자랐다. 그림에 소질을 보인 곽인식이 미술공부를 하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던 듯하다. 이후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가 일본으로 거취를 옮겨 그곳에서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42년에 귀국하여 대구의 한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 시기의 작품은 회화였으며 ‘인물(남)’(1937~38), ‘모던걸’(1939) 등을 대표작으로 꼽는다. 여기서 보이는 화풍은 일본에서 미술학교를 같이 다닌 임규삼, 임직순 등 동창생의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하지만 음영의 대조가 유달리 도드라져 자신이 받은 인상을 강조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1949년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집에서 시대상황상 좌우익 갈등이 벌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게 돌아간 일본은 패전의 결과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를 반영하여 신체를 왜곡하여 손발 같은 특정부위를 과장한 그림들을 그렸다. 초현실주의적 모습을 가졌다고 흔히 설명하는 작품들이다.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앵포르멜 미술과도 통하는 바가 있어 보인다. 1960년대 들어 작품은 회화라는 틀을 깨기 시작한다.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며 모두 변화를 원하던 시기였다. 전통을 거부하는 새로운 개념에 대한 열망이 서구 미술계에서도 일었다. 작가는 누구보다 빠르게 그리고 민감하게 이 움직임에 반응했다. 물질이나 상황을 캔버스 위에 묘사하기보다 그 자체로 제시하는 작업을 했다. 개인적으로 그의 작품세계 중 가장 감탄을 터트리는 시기다. ‘작품 63’(1963)은 일명 ‘유리 깨기’라고 불리는 작업방식을 통해 완성한 것이다. 작가는 유리판 크기의 땅을 파고 그 안에 유리판을 맞추어 넣었다. 쇠구슬을 떨어트려 조각을 내고 천으로 들어내 다시 하나로 합쳤다. 이러한 아방가르드적 작업을 하는 이는 한국, 일본을 통틀어 곽인식밖에 없었다. 단색으로 캔버스를 두껍게 칠하고 거기에 바둑알, 철사, 전구 등을 부착하는 작업도 했다. #동글동글한 타원형이 만들어내는 우주 1980년대에 이르러 그는 작업 재료로 자연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자연물과 행위를 합치하는 과정에서 자기 근원을 찾으려 했다. 강에서 가져온 돌을 쪼개어 다시 자연석과 붙이거나 나무를 태워 만든 먹을 다시 그 표면에 칠했다. 그리고 이러한 표면 위의 시도는 낱장의 종이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겼다. 그 위에 오랜 시간의 실험적 도전 끝에 얻은 깨달음을 담았다. “묵과 붓, 그리고 종이는 나에게 동양이 갖는 표현력과 신체의 리듬을 재발견하게끔 만들었습니다. 나의 ‘표기’라는 행위와 글자를 쓰는 것은 겉으로는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제 자신의 신체, 정신의 리듬, 호흡이 일치하는 것이 결정되고 있다는 것에는 하나도 바뀐 점이 없습니다. 이로부터 나 자신이 ‘자연’인 것을 자각할 수 있게 된 점은 무엇보다도 큰 희열입니다.”
‘작품 80-M’은 이렇게 시작한 연작 중 하나다. 앞서 언급한 한강 소설의 표지 이미지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가로 3M가 훌쩍 넘는 화면에는 많은 색 점이 존재한다. 동글동글한 타원형을 보고 있으면 사람의 엄지손가락 지문을 곱게 찍는다면 이런 모습일 것 같다. 노란색, 파란색, 검은색 그리고 보랏빛을 띠는 회색의 점이 무수히 서로를 오가며 그 만남의 흔적을 남긴다. 어느 한 가지 색이 자기 존재를 강하게 드러내는 부분이 있지만 다시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것이 인상적이다. 실제로 마주하면 얇은 전통 화지 위에 겹쳐진 곳마다 공간감이 느껴진다. 캔버스 천 위에 유화 물감을 겹쳐 칠하면 기존 붓질이 아래에 감춰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여기서는 처음 화면에 닿은 붓의 흔적부터 마무리까지 모든 과정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렇기에 더욱 세심하게 작업했을 그 정성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하나의 정신세계가 담긴 것 같다. 그래서 넓은 화면은 어느 순간부터 우주처럼 보는 이에게 다가온다. 누군가는 화면 안에서 부유하는 점이 빛과 같아 우주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곽인식을 다시 보는 시간 곽인식의 실험적인 작품세계는 이우환을 중심으로 등장한 모노하에 영향을 주었다고 읽힌다. 그가 재료 자체에 주목했듯 물체에 손을 거의 대지 않고 그 존재성을 보여주는 미술이다. 그리고 단색 화면에 물체를 붙였던 작품은 단색화에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단색화가 주목받으며 다시 한 번 일어난 이유다. 작고한 작가는 지난해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마침 그해에 ‘2019년 문화예술 발전 유공자’ 수훈을 받았다. 그의 작품세계를 기념하는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을 시작으로 고향 대구미술관을 순회해서 열렸다. 국내 및 일본에서 소장하고 있는 작품과 자료를 한데 모아 마련한 전시는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작가 사후에 방치된 작품을 50여점 복원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컸다. 지인이 대구에 가지 못한다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데려가고 싶다. 곽인식의 작품이 야외 조각장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끝없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높이 15m에 이르는 거대한 돌탑이다. 돌의 물성을 드러내기 위해 바닥부터 하나씩 쌓아 올려 만든 것임을 알지만 그것이 새로운 작업을 위해 끝없이 고민한 작가의 삶같이 느껴진다. 이 앞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되새기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김한들 큐레이터 겸 국민대학교 미술관, 박물관학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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