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부자의 과학과 빈자의 과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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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05-06-07 20:12] 과학은 오늘날 사회라는 옷감을 짜는 데 없어서는 안될 실 중의 하나이며, 아마도 가장 비싸고 화려한 실이 아닐까 생각된다. 특히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전개로 인해 벌어진 치열한 세계경쟁은 각국이 시장전망이 밝은 첨단과학에 집중 투자하며 이를 애국심에 호소하여 정당화하는 역설을 낳기도 한다. 이번에 황우석교수가 발표하여 전세계적 이목을 집중시킨 복제배아 줄기세포 연구도 바로 그러한 대표적 사례라고 여겨진다. 황교수의 연구에 대하여 국내외에서 제기된 우려나 반대의 목소리가 있었다면 그것은 인간복제의 가능성과 배아의 생명권 침해 등 윤리적 고려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그러나 황교수와 대부분의 언론이 강조했듯이 당장 난치병과 장애로 괴로워하고 죽어가는 환자들과 그 가족의 절박한 고통은 이러한 윤리적 고려를 사치스러운 것으로 느끼게 만드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난치병과 장애의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주장하는 이른바 ‘생명윤리’에 동감하여, 배아줄기세포가 약속하는 자신의 치료 가능성을 포기할 환자가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과연 첨단과학의 산물인 줄기세포 치료라는 것이 지금 수많은 난치병 환자와 장애인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실제로 자신을 치료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기적을 가져다 줄 수 있느냐에 있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줄기세포 치료대상이 되는 전세계 환자의 수는 약 1억3천만 명이며 이들이 창출할 줄기세포 치료시장은 연간 3천억 달러나 된다고 한다. 우리 정부도 이처럼 황금알을 낳으리라는 전망 하에 줄기세포 치료법을 ‘10대 차세대 성장동력산업’의 하나로 선정해 집중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줄기세포연구가 각광을 받는 것은 이러한 시장 선점의 의도와 연관되어 있으며, 이것이 실현되려면 궁극적으로 치료 지불비용이 환자의 호주머니에서 나와야 한다는 얘기다. 줄기세포는 장차 치료에 적용할 만큼 기술적 안전성이 설사 확보된다고 할지라도 엄청난 비용 때문에 모든 환자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갈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미 일부 임상단계에 들어간 성체줄기세포의 경우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최근 장애인소식지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제대혈을 이용한 줄기세포 이식은 네 번 정도 수술을 받아야 효과를 볼 수 있는데 한 번 수술에만 3천만원 정도의 비용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소수의 부유층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가 저소득층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러한 엄청난 치료 비용을 그들이 감당할 능력은 없다고 판단된다. 그렇다고 정부가 이들에게 줄기세포 치료의 혜택이 돌아가도록 의료복지를 획기적으로 확충하거나 소득분배를 단기간에 개선할 가능성도 없기 때문이다. 줄기세포만이 아니라 유전자 치료 역시 부자의 과학이 될 전망이다. 최근 서구에서의 연구경향은 단지 질병 치료를 넘어서서 외모와 지능 등 자질함양을 위한 유전자조작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기존의 계급불평등이 유전자조작으로 고착화된 생물학적 불평등으로 전환될 수 있으며, 그러한 미래는 영화 <가타카>와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이미 생생하게 묘사된 바 있다. 장애인과 치매 노인에게 줄기세포 치료라는 신기루는 약속하지만 정작 현재 그들의 이동권과 복지에는 무관심한 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때문에 나는 생명과학이란 비싼 실로 짠 새 옷이 대부분의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에게는 입어보지도 못할 부유층의 옷이 될까 걱정스럽다. 진정 빈자를 위한 과학은 현실에선 불가능한 꿈인가? 김환석/ 국민대 교수·과학사회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