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윤동호의 눈]600건 중 1건 선고되는 벌금형 집행유예 / 윤동호(법학부)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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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7일부터 500만원 이하 벌금형의 집행유예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벌금형 집행을 일정 기간 유예하고 의무사항을 준수하며 그 기간을 경과하면 벌금을 내지 않도록 하는 제도다. 이른바 ‘현대판 장발장’으로 불리는 생계형 범죄자들의 노역장 유치를 막기 위해 도입됐다. 그러나 2018년에 벌금형 집행유예가 선고된 사건은 1037건에 불과했다. 무려 52만3215건의 약식명령사건 중에서는 한 건도 없었다. 4만4346건의 정식재판청구사건 중 646건만이 벌금형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2018년에 벌금형 집행이 선고된 사건이 모두 58만2685건이었다. 2018년 한 해 동안 전국 법원에서 600건 중 1건꼴로 벌금형 집행유예가 선고된 셈이다. 같은 해 3년 이하 징역·금고형(흔히 자유형으로 부름)의 집행유예가 선고된 사건(8만7158건)은 자유형의 집행이 선고된 사건(7만332건)보다 많았다. 이렇다보니 2018년에 300만원 미만 벌금을 낼 돈이 없어서 노역장에 유치된 사람이 2만4640명이었다. 노역장 유치자가 2009년에 4만3199명이었는데, 10년 후인 2019년에도 3만5320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경기 불황으로 교도 작업 유치도 어려워서 교도소에 일거리가 없단다. 노동 없이 구금만 있는 것이다. 왜 약식절차에서는 벌금형 집행유예 선고가 한 건도 없는 것일까. 약식절차는 경미한 사건의 신속한 처리를 위해 마련한 서면 심리절차로서 검사의 약식명령청구서에 의존한다. 한 해 평균 61만 건에 달하는 약식명령사건에 대해 법원이 벌금형 집행유예 선고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다. 이 판단은 약식절차의 신속성의 취지에 어긋난다고 법원은 말하지만, 약식명령청구 후 법원의 서면심리기간 14일(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 제22조)은 지켜지지 않고 대부분 1개월을 초과해 처리되고 있다. 벌금형 집행유예제도를 도입하면서 약식절차에서도 이를 선고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기는커녕 법원은 사건처리 부담을 걱정해서 오히려 제도의 활용을 어렵게 했다. 약식명령에 대한 정식재판청구를 주저하도록 형사소송법을 개정한 것이다. 종전에는 불이익변경금지원칙이 있었다. 예컨대 300만원의 약식명령을 받은 사람이 정식재판을 청구하면 정식재판절차에서 그 금액보다 높은 금액을 선고하지 못했다. 따라서 생계형 범죄자들이 벌금형을 선고받고 부담 없이 벌금형의 집행유예를 기대하면서 정식재판을 청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을 의식해서 형종변경금지원칙으로 개정한 것이다. 약식명령에 대해 정식재판을 청구하면 벌금형을 자유형으로 바꿀 수는 없지만 벌금액수를 상향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실제 약식명령 고지서에 정식재판을 청구하면 벌금액이 무겁게 바뀔 수 있음이 명확히 기재돼 있다. 약식절차에서 벌금형 집행유예가 선고된 사건이 한 건도 없는 이유다. 법과 제도의 공백을 인권연대가 설립한 장발장은행이 메우고 있다. 선고받은 벌금을 내지 못해 노역에 끌려갈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최대 300만원(상환기간 1년)을 무이자·무담보로 빌려주고 있다. <윤동호 국민대 법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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