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전통의 변주, 우리 것의 쇠퇴 혹은 찬사 / 조현신(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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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미학적 쾌감과는 동떨어진 ‘우리의 것’에 대한 당위성과 책임감, 죄책감과의 복합적 산물일지도 모를 일이다. 근대기의 책 표지 속에서, 우리에게는 이제 전통으로 굳어버린, 조선적인 것들은 다양한 시각적 재현뿐 아니라 물질적 복구로 호명됐다. 구체적 형상의 재현
고소설 딱지본의 표지는 조선 서적에 등장하던 삽화 양식에 채색을 입힌 것이 많은데, 주로 기와집, 한복, 소 나무, 구름, 학, 달, 능수버들, 말과 장수 등 구체적인 표상으로 채워져 있다. 이 중에서도 내용의 극적인 장면 을 묘사한 삽화류 표지와 달리 산수화나 민화풍의 딱지본 중에는 수준 높은 완성도와 섬세함을 보이는 것들 이 많으며, 전문 화공들이 그린 것임을 입증하는 낙관이 찍혀 있다. 이 중 관재 이도영 장정, 춘향전 『옥중가 인』의 표지를 잠시 보자. 이도영은 1909년 대한민보에 조선 최초로 풍자만화를 게재한 화가이자 만화가였 다. 화조도의 한 부분을 클로즈업한 듯한 화면, 전통 서적 양식의 제호가 짙은 노랑 바탕 위에 배치되어 있다. 담백한 바탕에 그려졌던 조선의 화조도와는 뉘앙스가 다르다. 많은 고소설 딱지본 표지에서 조선의 것들은 새로운 석판 인쇄의 옷을 입고 한동안 인기를 누리다가 딱지본의 쇠퇴와 더불어 사라진다. 『두껍전』의 소나 무, 구름, 달 역시 친근한 조선의 기표가 서구의 인쇄술을 빌려 잠시 등장한 예이다. 정현웅이 디자인한 『조선창극사』는 붉은색 바탕에 화려한 색깔의 봉황을 운동감 있게 배치했다. 붉은색이 책 표지 전체에 사용된 것은 드문 경우이며, 특히 붉은색은 곤룡포, 왕의 간찰에서나 사용되는 왕의 색이었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이 표지에서의 전면적인 붉은색은 특히 조선적인 것에 대한 일종의 경의로 다가왔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해방기의 발랄한 표현들 『상허문학독본』(백양당, 1946) ‘수선사’의 인지 전통적 소재는 해방기에 더 자주 등장하는데, 억눌렸던 민족의식이 분출되면서 나와 우리의 공통적인 기반 으로 전통을 호명했을 것이다. 특히 해방기 출판사들의 로고는 일제강점기에 비해 뚜렷한 분방함을 보여준 다. 이 중 1945년에 설립된 을유문화사는 이름과 로고, 책 표지까지 일련의 이미지 아이덴티티 프로그램인 CIP(Corporate Identity Program)를 실시해 편집 전반에 전통적 미감을 도입했다. 이 중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였던 을유문고 시리즈는 기하학 도형의 경직성과 구름 문양의 운동감을 대조적으로 배치하여 경쾌한 리듬감을 보이고 있으며, 이후 비취색 바탕에 비천상이 들어간 장정은 긴 시간 한국 문고본의 얼굴 역할을 했다. 해방기 흥미로운 출판사였던 백양당은 작은 모던 양품점을 하던 배정국이 이태준, 김기림 등의 지식인, 서예가 손재형과 가깝게 지내면서 시작한 출판사이다. 국문학자 김윤식은 백양당의 표지 디자인을 기품 있는 고담한 선비 취향이며, 그 디자인이 문화 자본의 회로에 들어가면서 표지로 인해 판매 부수가 현격히 높아졌다는 해석을 하고 있다. 이태준의 『상허문학독본』에는 옥색 바탕의 앞, 뒤표지 전면의 와당문에 꽃 패턴이 감각적으로 배치됐고, 창문처럼 들어간 뒤표지 중앙의 로고는 수묵화의 미감을 발산하고 있다. 재판 역시 민화 책가도의 한 장면을 펜화로 재현했다. 여기서 잠깐 출판 디자인에서 한동안 유지됐던 인지를 들여다보자. 인지는 발행 부수와 인세를 해결하기 위해 판권 페이지에 붙이는 우표 크기의 종이였다. 이 중 시인 계용묵과 백병원 원장 백인제가 창립한 수선사의 인지는 반쯤 열린 한옥의 빈 공간에 저자의 도장을 찍게끔 디자인됐는데, 선비들의 멋과 공간감까지 보여주는 듯하며 그 크기 또한 책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 외에 정음사의 물고기 풍경, 백양당의 한지의 물성, 아문각의 인지에서도 전통적 미감이 또렷하게 발산되면서 표지 디자인에서는 제한된 출판사의 일관된 정체성을 보여준다. 전통의 합목적 호명
서울대 공예과 교수였던 이순석이 디자인한 『시집구상』의 표지는 백제의 산수문전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하며, 제호는 공초 오상순이 썼다. 산과 구름, 꽃과 나무의 민화적 이상향, 녹색과 주황색의 대비, 5침 안정법에 의한 선장제본, 세로쓰기 등으로 전통적 표상의 재현뿐 아니라 물상의 복원까지 이루어낸 작품이다. 하지만 한국전쟁 중 피난지 대구에서 출간된 이런 완벽한 전통의 복원과 도가적 이상향이 사형당한 사제였던 형, 북에 두고 온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절절한 이 시집을 묶는 표상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시인의 이 아픔은 당대를 같이한 한국인과 공유된 아픔이라는 점에서 문학은 단지 한 작가의 미학적 호오만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으로 상상의 과거를 그리워하는 행위인 노스탤지어는 어긋난 현재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만들어진 전통’, 허위의식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북 디자인은 시각적 완결성이나 미학적 평가와는 또 다른 층위의 사고를 요하는 디자인 작업이다. 다시 일본식, 서구식 미감으로
전통적 미감들은 추상적 표현과 양식의 응용 등 다양하게 등장했다. 장욱진 작품인 이병도 수필집 『두계잡필』은 현대적 미감의 책가도이며, 박문원이 디자인한 『박꽃』에서는 고유섭이 조선의 맛으로 지칭한 “구수한 큰 맛”의 수사가 체감되는 듯하며, 기물들이 질서 없이 무심히 놓인 구도는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의 미니멀적인 해석이기도 하다. 이 외에 김규택이 장정한 『태평천하』의 당혜와 남자의 비단신 등은 전통적 물상들이 현대적 기법으로 호명된 예이다. 장석수 화가의 『육사시집』, 서세옥 화백의 『춘향이 마음』은 조선 수묵화의 담백한 색채와 질감, 타이포그래피의 묘미를 보여주고 있다. 해방 공간에 등장한 이런 다양하고 발랄한 전통적인 것들은 195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점점 사라지면서 서구 추상화의 물결로 뒤덮인다. 또한 1970년대에는 일본으로 유학 갔던 디자이너들이 돌아와 한국의 산업화 시대의 디자인에 참여하면서 특히나 출판사의 로고들이 작은 지면에서 보여주던 전통적인 것들의 질감과 표상은 사라진다. 이후 특히 로고들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모든 기업이 보여주던 일본식의 딱딱하고 정형화된 감각들이 기업 CIP의 대세를 만들기 시작했다.
현재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대학원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친근하고 낯익은 한국 디자인 역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근대기에 형성된 한국적 정서의 디자인 표현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일상과 감각의 한국디자인 문화사>(글항아리, 2018)를 출간했다.
원문보기: https://blog.naver.com/todayslibrary/222077061406 ※ 게재한 콘텐츠(기사)는 언론사에 기고한 개인의 저작물로 국민대학교의 견해가 아님을 안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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