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에서 성 정체성을 드러내는 여러 가지 기호에는 어떤 합리적 근거도 없다. 예를 들면 출산용품에서 남자아이들에게는 파란색을,여자아이들에게는 분홍색을 부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어려서부터 그런 색 사용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어느 시기부터인가는 그 색에 맞추어 자신의 성 정체를 인식한다. 이런 과정이 되풀이되면 매너리즘에 빠진 선택만을 하게 되므로 결국 고리타분한 취향의 소유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귀족들의 분홍 실크 스타킹과 리본, 날렵하고 화려한 구두와 조선의 어사화, 관복과 흉배, 비단신만 보아도 색은 오히려 신분과 부의 상징이었지 성 정체성과는 관계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근대기에 이런 상징체계가 깨지면서 인공물에는 당대의욕망과 관습이 부가되었고, 결국 스스로가 이데올로기의 매체가
되었다. 스포츠에서도 이 성 정체를 나타내는 기준의 매너리즘은 그대로 지속되는 듯하다.
2019 프랑스 여자 월드컵 포스터
2019 프랑스 여자 월드컵 포스터
2003년부터 FIFA(국제축구연맹)에 도입된 여자 월드컵 포스터와 남자 월드컵 포스터를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차이점이 발견된다. 강한 햇살 무늬를 사용하여 퍼져나가는 힘을 상징한 두 장의 포스터를 보자. 2019년 프랑스에서 열린 여자 월드컵의 포스터를 보면, 핀을 꽂고 머리가 불길이 이는 듯한 붉은 빛으로 물든 여인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트로피도, 뻗쳐나가는 힘도 나선형으로 솟구치며 포스터는 에너지로 충만하다. 하지만 이런 뉘앙스보다도 먼저 와닿는 것은 강하게 정면을 응시하여 보는 이에게 도전의 눈길을 던지는 그녀의 긴 눈썹과 붉은 입술이다. 그 이미지가 강렬하여 첫눈에 멋지고 강인한 여자의 이미지만 남을 뿐, 그녀가 축구선수일 것이라는 추측은 불가하다. 그 패턴이 축구공이라는 것도 언뜻 보아선 인지되지 않는다. 헤드라인을 읽어야만 그 문양이 축구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포스터의 기본 미덕을 못 보여주는 것이다.
모든 선택된 이미지는 선택되지 않은 것들을 암시적으로 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각매체에 사용되는 이미
지는 어떤 선택이든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이런질문이 나온다. 왜 여자 축구 포스터에는 여성의 얼굴 그림이 들어가는가? 그리고 그 뒤의 꽃무늬와 도트, 사선의 축구공 장식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너무 이쁘게만 보이는데 하는 의문이 든다. 장식은 신체의 강한 에너지의 분출과 조직적 협동, 냉철한 판단에는 걸리적거리는 여흥이며 즐거움이다. 그러므로 포스터 속의 도트와 자잘한 꽃무늬, 붉은 입술, 강조된 속눈썹은 여자 축구를 불타오르듯 정열적이지만 그러나 아름다운 여성들의 스포츠라는 차원에서 묘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성들은 꽃을 만들기보다는 스스로 꽃이 되고 싶어 한다”는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명제를 실현한 듯하다. 하지만 강인한 몸과 정신을 추구하며, 승리를 위해 혹독한 훈련을 하는 여성들은 적어도 유명 축구선수를 섹시한 몸매와 얼굴로 유혹하여 쇼핑과 파티, 럭셔리한 삶을 취하려고 기를 쓰는 왝스(WAGs)1)와는 다르지 않을까?1)
왝스(WAGs): 유명 축구선수의 아내나 여자친구를 가리키는 말로Wives And Girlfriends의 약자이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때 잉글랜드 대표팀 선수들의 아내와 여자친구들이 소도시 바덴바덴에서 특급호텔,쇼핑 등에 백만 파운드를 사용한 것이 알려지면서 전 세계의 이목을 받게 되었고, 스페인의 한 언론은 이들을 ‘비자카드를 소지한 훌리건’들이라고 했다. 현대판 신데렐라의 모델들이며, 영국에서는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이들을 본받지 말라고 교육을 해야 할 정도라고 한다.
2018 러시아 월드컵 포스터
2018 러시아 월드컵 포스터
2018 러시아 월드컵 포스터를 보자. FIFA는 “포스터를 디자인한 러시아의 화가 이고르 구로비치는 1920년대 후반 러시아 구성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면서 “공에서 내뿜어지는 광선은 구성주의 작품의 특징으로, 대회의 에너지를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축구경기장을 상징하는 녹색 원과 러시아 지도를 넣은 축구공, 야신의 몸에서 뻗어나가는 광선이 중요한 조형 요소이다. 이렇게 사진과 일정한 도형을 결합한 콜라주 양식을 구성주의 양식이라 하는데 이는 러시아 혁명기, 소비에트 건설 시 선전과 프로파간다를 위해 사용되었다. 사각형의 예술가 말레비치,엘 리시스키, 마야코프스키 등이 활약했으며 선언문을 통해 “네모꼴의 장미를 만들어라”라는 등의 요구를 하며 조형을 통한 의식과 사회의 변화를 추구했다. 사진의 사실성이 주는 신뢰성, 현실성, 새로운 기술의 암시에 새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가 담겼으며, 여기에 선과 도형, 색 분할 등이 강하게 결합된 포스터들은 디자인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명작들을 많이 만들어 냈다. 역사적 아우라를 빌려온 이 포스터는 복고풍의 느낌을 풍기며, 축구를 그대로 지시하며, 영웅의 에너지 등을 보여준다.
2014 코스타리카 U-17 여자 월드컵 2015 캐나다 여자 월드컵 포스터 2019 프랑스 여자 월드컵 포스터
새로운 기호를 보고 싶다
신체의 한계를 끝없이 갱신해야 하고, 팀워크를 키워야 하며,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 하는 축구라는 주제의 형상화가 축구 포스터의 본질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포스터를 볼 때 이러한 스포츠 본질의 정신보다는 장구한 세월동안 여성과 남성에게 숱하게 부가된 장식, 색깔, 기준 등 이 부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포스터를 잠깐 보자. 2014년 코스타리카 여자 월드컵에서는 나비, 분홍 꽃, 푸른 나뭇잎이, 2015년 캐나다. 여자 월드컵에서는 캐나다의 상징인 단풍이 녹색과 빨강의 색 배합으로 사용되었다. 2007년 중국 여자 월드컵에서는 축구공 반지, 축구공 귀걸이, 붉은 입술, 아기곰 형상이 등장했으며, FIFA 후원업체인 테탱저에서 만든 2019년 프랑스 여자 월드컵 포스터 속의 여성은 긴 머리를 휘날리며 축구공을 핸들링하고 있다. 이 모든 포스터는 원형의 스펙터클한 경기장을 배경으로 거대한 신들처럼 팔짱을 끼고 서 있거나, 맹렬하게 최고의 속도로 공을 차며달리는 모습이 담긴 FIFA 남자 축구 포스터와는 많이 대조된다.
결국 FIFA의 여자 축구 포스터는 오래 묵은 상징으로 여성을 보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아마 아름다움의 다양성을 그려내고, 축구의 본질을 보여주는 포스터가 나오려면 더 오랜 세월이 걸릴 듯하다. 관습적인 여자고유의 기호도 아니고, 남자 축구 포스터와는 구별되는 또 다른 기호를 창안해 내야 하니 말이다. “왜 여성들의 성공 세레머니는 겸손해야 하는가”, “이중 잣대를 들이대지 말라”, “별 볼 일 없는 남자 축구팀보다 월급이 적다”, “동일 임금 동일 대우”를 해달라고 하는 등 그녀들의 요구는 지속되지만, 그들 스스로도 그 요구가 이른 시일 내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듯이.
글을 쓴 조현신은 현재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대학원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
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친근하고 낯익은 한국 디자인 역사를 연구하
고 있으며, 특히 근대기에 형성된 한국적 정서의 디자인화에 관심이 많다. 2018년
『일상과 감각의 한국디자인 문화사』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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