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사회가 끝나고, 근대기가 시작되면서 각 개인의 신분과 계층에 종속되어 있던 모든 인공물의 상징으로서의 운명도 끝난다. 독일의 사회철학자 게오르그 짐멜이 “혈연, 종교와 지역의 고리가 끊어진 현대에서 개인은 자신의 존재성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외로운 운명을 지고 등장했다”라고 했듯이, 대중의 이름으로 탄생한 현대인은 자연히 익명의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성을 대신해 줄 물건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이런 연유로 전통기 이후 집, 자동차,가구, 커튼, 카펫, 가전 도구, 핸드백, 구두 등 수많은 물건이 개인의 능력과 지위를 드러내는 기호로 다시 등장했지만, 역시 가장 뚜렷한 정체성의 기호는 패션이다.
도시적 느슨함과 도발적 섹슈얼리티의 공존
장기화한 코로나19 사태로 ‘홈트(홈 트레이닝의 약자)’가 유행하면서, 잘 다듬어진 몸매의 유튜버들이 시청자에게 말을 걸거나 구령을 붙이면서 집에서 트레이닝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이들이 입고 있는 옷은 모방심리를 유발하는 애슬레저 룩이 대부분이다.
애슬레틱과 레저룩의 합성어인 애슬레저 룩은 말 그대로 강인함과 느슨함, 긴장과 여유, 중성적 건조함과 도발적 섹슈얼리티를 동시에 추구하는 복장으로 근래 흔히 ‘요즘 것들’의 필수 아이템이다. 완전히 밀착된 상의나 반바지, 요가 바지, 후드 티, 레깅스, 스니커즈 등의 옷들은 스마트 지능, 기능의 혁신 등을 통해 오피스룩으로의 확산까지 이루어질 전망이라고 한다.여성 애슬레저 룩 인터넷 쇼핑몰의 첫 화면에는 대부분 화장을 짙게 한 모델들이 볼륨 있는 가슴만 가려지는 상의, 혹은 초미니 반바지를 입고 유혹의 눈길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남성의 경우,소매 없는 탱크톱으로 근육질의 팔뚝을 강조하고, 상의를 살짝 들거나, 단추를 풀러 식스팩을 보여주는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그동안 여성이 가슴골을 살짝 보여 미완의 관음증을 남성들에게 선물했듯이, 이제 남성들의 몸이 똑같이 유혹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런 화면들은 스포츠의 영역에 성이 상품화되어 자연스럽게 이입되는 과정이며, ‘스포츠 하는 몸’의 관용구를 바꾸어 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종래의 스포츠 하는 몸이 강인함, 약동, 한계 극복 등의 관용적 구절로 표현된다면, 이 애슬레저 룩 속의 몸은 도발적 섹슈얼리티와 도시적인 느슨함의 공존이라는 단어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이미지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패션과 그 안의 몸을 지시하는 가장 대표적인 관용어일 것이다.
애슬레저 룩 속의 반영적인 몸들
개인의 몸 사용법을 연구한 아서 프랭크는 행동과 관련된 네 가지 인간의 몸을 이야기한다. 첫째는 ‘훈육된 몸’으로 합리적 금욕주의적 습성을 보이는 몸이다. 대표적으로 금식을 통해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성직자 혹은 명상가 등의 몸이다. 둘째는 ‘지배의 몸’으로 외부의 힘에 의해 통제된다. 단적으로 전쟁터의 몸을 들 수 있는데 이때의 몸은 단지 병기일 뿐이며, 이 몸의 소유자는 대부분 트라우마를 겪는다고 한다. 셋째는 ‘반영적 몸’으로 소비, 백화점의 몸이다. 넷째는 ‘의사소통적 몸’으로 서로 인정받으며 공유할 이야기가 있고, 공동체 의식, 보살핌의 관계를 지닌 몸이다.현재 애슬레저 룩을 걸친 몸들은 이 ‘반영적 몸’들의 대표이다. 아서 프랭크에 의하면 이 반영적 몸들은 스스로 장식되기 위해 자신의 표면과만 관계 맺고 몰두하는 자아도취적 성향을 지니며, 몸을 감각적 만족의 도구로만 취급한다. 한 가지 특이한 현상은 현재 이 애슬레저 룩 속의 몸들이 지닌 시각적 특징이 점점 게임 속 전사 캐릭터들의 성적 유혹과 파워를 분출하는 몸을 모방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들은 이제는 인간의 몸이 생산성을 올려야 할 몸이 아닌, 잉여의 몸이 되어버린 지 오래된 시점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식스팩은 스포츠 스킬의 향상을 위해 지속해서 훈련할 때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결과였다. 하지만 이제는 이 식스팩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다.
의사소통적 몸과의 균형 필요
이 애슬레저 룩은 헐렁한 추리닝 패션 속의 관리되지 못한 루저들의 몸, 아웃사이더의 스포츠 패션에 자극적인 이미지를 부가한 패션 코드이기도 하다. 동시에 애슬레저 룩의 저 강인하면서도 시크한 몸매들은 우리 몸의 한 상태를 외면하고자 하는 심리를 촉진한다. 이들은 병들어 늙어가면서 변형되고, 주름 잡히고, 장애를 겪어야 하는 몸을 차단하며, 그 몸의 추방을 촉진한다. 그리고 이러한 추방은 “우리를 기습하는 것, 우리를 맞히는 것, 우리를 덮치는것,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 우리를 변모시키는 것”(마르틴 하이데거), 즉 우리가 이질적인 것들과 소통할 때의 본질인 고통을 외면하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애슬레저 룩의 ‘반영의 몸’들은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의 ‘좋아요’의 환대를 받으며 끊임없는 폐쇄적 동질성 속에서 확산된다.철학가 한병철은 SNS상의 ‘좋아요’ 현상은 타자를 수용하지 못하고 동질의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폐쇄된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경청과 환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경청과 환대를 상징하는 몸은 결국 아서 프랭크가 제시한 의사소통적 몸일 것이다. 즉 자신의 표면에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같은 이야기와 기억을 공유하는 몸, 보살핌을 주고받는 몸에 대한 의식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늙고 변형되어, 윤기가 사라지는 몸들도 나르시시즘적으로 가꾸고, 부단히 반영적 몸의 현상을 좇으라고 부추기는 현 사회에서 과연 의사소통적 몸이 애슬레저룩의 기세와 균형을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글을 쓴 조현신은 현재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친근하고 낯익은 한국 디자인 역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근대기에 형성된 한국적 정서의 디자인화에 관심이 많다. 2018년 『일상과 감각의 한국디자인 문화
※ 게재한 콘텐츠(기사)는 언론사에 기고한 개인의 저작물로 국민대학교의 견해가 아님을 안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