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논현논단_이호선 칼럼] 광기와 야만을 자처하는 집권세력 / 이호선(법학부)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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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 법대 학장/前 한국헌법학회 부회장
거대 의석 앞세운 타깃 법안 난무
법의 여신은 눈을 가린 채 서 있다. 어떤 편견도 갖지 않고 공정한 심판을 해야 한다는 상징이다. 그러나 이런 엄정함은 비단 법정의 판사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사법의 영역 뿐만 아니라 입법 과정에서도 법은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해득실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공정과 정의를 반영하여 만들어져야 한다.
만약 이 원칙이 무너진다면, 존 롤스의 경고처럼 법체계는 “독재자나 전제적 통치자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고안된 개별 명령들의 집합”으로 퇴락하고 말 것이다. 이런 법들을 영미에서는 인신박탈법(Bil lof Attainder)이라고 한다.
‘답정너’의 결론을 내려놓고 판결을 법률의 형식 속에 집어 넣은 대표적인 사례로 헨리 8세가 의회를 압박하여 만든 ‘독살행위에 관한 처벌 특별법(1531년)’이 있다. 1531년 2월 로체스터 주교 존 피셔의 집에서 음식을 먹은 두 사람이 사망하고, 피셔는 음식을 조금만 먹은 탓에 죽지는 않았다. 요리사 루스가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헨리 8세는 곧바로 의회를 소집해 장시간 연설을 통해 루스를 참수형이나 교수형 대신 특별한 방식으로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고, 의회는 곧바로 “독살범은 끓는 솥에 삶아 죽인다”는 특별법을 만들었다.
이 신설 특별법은 루스에게 소급 적용되었고 배심재판도 없이 곧바로 유죄가 확정된 그는 1년 뒤 스미스필드 광장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끓는 가마솥에 세 차례나 빠뜨려졌다 건져졌다를 반복하면서 문자 그대로 삶겨서 죽었다. 그런데 특별법 제정과 유죄 확정까지 2개월 밖에 안 걸렸으나 그 집행에는 1년이 소요된 것에서 보듯이 이 사건의 바탕에는 헨리 8세의 다혈질적 정의감이 아닌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존 피셔 주교는 당시 헨리 8세가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볼린과 혼인하려는 것에 반대하고 있던터라 헨리 8세가 그렇게 격분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이 독살 미수의 배후에 앤 볼린이나 그 아버지가 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독살을 면한 피셔는 몇 년 후 헨리 8세에 의해 참수형에 처해졌다.
특정인을 겨냥한 다목적 용도의 헨리 8세와 영국 의회의 합작품인 ‘독살처벌특별법’은 그 잔혹성과 예외성 때문에 16년 만에 폐지되었다.
이러한 교훈은 20세기 영연방의 일원이었던 스리랑카에서 벌어진 ‘인신박탈법’의 위헌 여부를 판단하는데 반면 교사로 작용하였다. 1962년 스리랑카에서 군부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자, 스리랑카 정부는 이미 기소된 피고인들을 겨냥해 특별법을 만들었다. 특별재판부와 불리한 증거규칙을 강제했으며, 최소형을 10년 이상으로 높이고 재산 몰수까지 가능하게 한 이 법에는 당연히 소급효까지 인정되었다.
피고인들은 이 법에 따라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최종 항소심이던 영국 추밀원은 이를 뒤집었다. 입법부가 특정 사건의 피고인을 겨냥해 유무죄와 형벌을 결정하는 것은 권력분립을 파괴하는 위헌적 행위라는 판단이었다. 법은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규범이어야 하며, 특정인을 겨냥한 처벌 도구가 될 수 없다는 원칙을 확인한 것이다.
그런데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헨리8세의 고약한 유령을 마주하고 있다. 거대 의석을 앞세운 민주당은 내란 전담 특별재판부 설치, 사면·복권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법률, 심지어 소급 적용까지 시도하고 있다. 이는 삼권분립의 원칙을 파괴하고 입헌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입법부가 사법부의 권한을 빼앗아 특정인을 겨냥해 단죄한다면, 국회는 더 이상 국민의 대표기관이 아니라 정치 보복의 도구가 되고 만다.
민주당과 그 주변부 어용 세력이 시도하는 것은 지금은 몇몇 사람을 타켓으로 삼지만, 이런 유혹은 곧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뻗어 간다. 한번 어기기가 어렵지 일단 선(線)을 넘게 되면 그 다음부터 원칙은 무의미하게 된다. 지금 난무하는 각종 ‘특별법’이 ‘보통법’을 밀어내는 바람에 일반적인 보통의 법이 멸종 위기에 처해진 상황만 봐도 표적입법, 입법을 통한 국회 재판이 곧 횡행할 것이란 걸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헨리 8세 시대 영국조차 16년 만에 폐지한 야만을 21세기 대한민국이 되살려서는 안 된다. 사법이건 입법이건 복수의 도구가 아니라 자유의 보루여야 한다. 조선 시대에도 실제로 행하지는 않았던 팽형(烹刑)을 우리 시대에 허용할 수는 없다. 우리 사회가 끓는 솥의 광기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시민들이 나서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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