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국민주권’ 참칭한 위험한 폭주[시평] / 이호선(법학부)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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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선 국민대 법대 학장
국민은 선거 직전 유권자 아닌 헌법 제정권력의 공동체 의지 正名과 거리 먼 국민주권정부
입법부의 팽창 속성 견제해야 사법심사는 주권 담보할 장치 삼권분립 조롱은 반민주 시인
세상이 어지럽다. 흑과 백이 바뀌고, 선이 악으로, 악이 선으로 불리는 일이 횡행한다. 이 혼탁함의 중심에 정명(正名)의 실종이 있다. 현 정부·여당이 스스로를 ‘국민주권정부’라 칭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기만이거나 무지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지금 이재명 정부와 166석이라는 거대 의석을 앞세운 더불어민주당이 보여주는 것은, 국민주권 원리를 구현한다기보다는 절대다수의 힘에 기댄 입법독재라고 불러도 충분할 정도이다. 억지로 갖다 붙인다면 의회주권(parliamentary sovereignty)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 용어는 과분해 보인다. 필자로서는 정파주권(partisan sovereignty)이라고 부르는 게 그나마 점잖은 표현으로 보인다.
명예혁명 이후 한때 영국에서는 의회가 국가 의지의 최고 권위를 가진다고 여기던 시대가 있었다. ‘의회는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것만 빼고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격언은 당시 의회주권의 절대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자 조롱 섞인 풍자였다. 그런데 영국의 의회주권은 지금 이재명 정부와 여당이 보이는 것과 같은 막장극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례로 내각이 하원에서 불신임을 받으면 총리는 사임하거나 국왕에게 해산을 요청하는 것이 정치적 관례였다. 이는 성문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헌정 전통이 형성한 헌법적 관습(constitutional convention)이었다.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정치적 예양이 사실상 의무로 작동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지금 집권 세력의 입법 폭주, 권력 분립에 대한 노골적 침해는 가장 극단적인 영국의 의회주권 신봉주의자들에게조차 상상 불허이다.
국민주권에서의 ‘국민’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 제2항의 국민으로서, 단순히 직전 선거의 유권자 집단이 아니다. 그것은 헌법질서를 세운 제정권력으로서의 국민이다. 과거 헌법을 만든 세대, 현재 이를 이어받은 세대, 미래 이를 계승할 세대까지 포괄하는 공동체 전체의 의지를 의미한다. 국회는 이 국민이 세운 질서와 한계 속에서만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미국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은 3개의 권력 중 가장 팽창욕이 강한 것이 입법부이므로 공화정을 위해서는 입법부 내에서도 선출 방식과 작동을 달리하는 시스템을 두어 서로 견제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오늘의 상·하 양원제이다.
이처럼 헌법은 선출된 권력의 팽창적 속성과 부패하거나 불의할 경우를 대비해 권위의 정당성을 달리하는 선출과 임명이라는 이중구조를 설계했다. 따라서 “선출된 권력이 임명된 권력보다 우위에 있다”는 말은 허황하고 위험한 주장이다. 4년 임기의 비정규직으로 선출된 국회의원과 5년 임기의 대통령이나, 헌법상 임기를 보장받고 임명된 판사나 모두 헌법에 근거가 있다. 헌법 설계자들의 의도를 반영한 결과로, 국민주권의 실효성을 보장하기 위해 삼권분립과 사법부 독립이 마련된 것이다.
국민주권의 핵심은 사법심사에 있다. 영국이 의회주권을 민주주의의 기초로 이해했다면, 미국은 시종일관 국민주권을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삼았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최종적으로 사법심사를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 연방 하급법원의 판사들조차 의회의 법률이 위헌이라고 판단되면 그 적용을 배제할 수 있도록 해 뒀다. 입법부의 횡포를 막기 위해 헌법에 아예 판사들의 급여는 감액할 수 없다고 못 박고, 지금까지 그 규정은 내려오고 있다. 입법과 행정에 대한 사법심사의 정신은 국민주권을 실질적으로 담보하기 위한 장치였다.
물론 헌법 설계자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정치 판사, 법복을 부끄럽게 만드는 편협한 판사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썩은 물과 그릇은 구분해야 한다. 삼권분립은 불의와 부패로부터 국민주권을 지키기 위한 헌법적 결단이자 최후의 수단이다.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이 삼권분립을 조롱하고 무너뜨리며 스스로를 ‘국민주권정부’라 부르는 것은 국민주권을 참칭한 또 하나의 정치적 사기에 불과하다. 그냥 이재명 정부라 부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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