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5000년 이어온 가난의 사슬을 끊다 / 김영수 일본학연구소 책임연구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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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배경지식 키우기] 박정희의 <우리 민족의 나갈 길> 가난은 인간의 영혼을 파괴한다. “가난이란 단어는 끝없는 상실감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독기와 오기를 품게 한다. 가난해보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운 처절함이며, 희망을 잘라먹는 바이러스와 같다.”(200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Muhammad Yunus) 나라님도 구하지 못했던 가난
우리 민족은 가난의 설움을 싫도록 겪었다. 배고픔도 해결할 수 없는 처절한 가난이었다. 태평성대로 알려진 세종대에도 굶주린 백성이 흙을 파서 떡과 죽을 만들어 먹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체념한 사람들은 아예 그것을 관조했다. 군자라면,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었으니, 대장부 살림이 이만하면 족하리”라는 안빈낙도의 품격을 지녀야 했다. 공자의 제자 안회는 한 그릇의 밥과 물을 먹으면서도 즐거워했으나, 굶어죽었다. 이율곡이 죽었을 때는 장례비용이 없었다. 그러나 보통의 빈자들은 가난의 “불행에 의해 파괴된 운명의 표류자들”일 뿐이다. 우리 민족의 절반이나마 굶주림에서 벗어난 것은 불과 40여년 밖에 안 됐다. 1977년은 5천년 민족사에 한 획을 그은 해이다. 그 해 10대 뉴스 중에는 쌀막걸리 생산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게 무슨 대뉴스인가? 1977년 통일벼 덕분에 쌀 생산량이 4천만 섬을 넘어섰다. 이 수치는 한민족이 5천 년간 어떻게도 해결할 수 없었던 숙명 같은 배고픔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뜻했다. 한국인의 운명관을 바꾸다
이 책의 기본적인 질문은 머리말에 나와 있듯이, “우리 민족에게는 갱생의 길이 없을까?”이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반드시 길이 있을 것이다. 설움과 슬픔과 괴로움에 시달리던 이 민족의 앞길에는 반드시 갱생의 길이 있을 것이다. 두드리면 열린다고 하지 않았는가?”라고 답한다. ‘갱생’과 ‘자조(自助)’, “하면 된다”는 의지는 화두가 되어, “우리도 한 번 잘살아보세”라는 6, 70년대의 국민적 열정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이 한국 역사를 바꿨다. 박정희는 위대한 사상가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역사상 누구보다도 한국인의 생활감정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한국인의 운명관을 바꾼 사람이다. 한국인의 생활과 태도에서 패러다임 쉬프트(이동, shift)를 주도했다. ‘빨리빨리주의’나 극성스런 업적주의, 실용주의, 돌관(突貫)주의는 다 전통적인 한국인의 생활감정과 거리가 멀다. 이런 변화는 신채호, 안창호, 이광수 이래 ‘민족개조론’의 연장선상에 있다. 공산주의와 경쟁에서 승리 박정희는 도저한 현실주의자지만, 소박한 정신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한국혁명이 정신혁명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이상적 한국인상은 전통적인 군자나 선비, 또는 근대 시민도 아닌 국민과 공민(公民)이다. 두 개념은 ‘민족’에서 하나가 된다. 국가와 민족에 헌신하는 자기희생적 인간상이다. 1920년대 이후 한국에서 가난과 대결한 또 하나의 사상이 있다. 공산주의이다. 많은 지식인들과 농민, 노동자들이 이 사상에 헌신했지만, 일단 역사에서 실패했다. 근본 이유는 ‘자유’의 부재에 있다. 역사는 정의 없는 자유도 부패하지만, 자유 없는 정의는 더 부패하고 억압적으로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박정희 시대는 빛만큼 그늘도 깊었다. 균형을 잡으려면 ‘사상계’와 ‘전태일평전’을 같이 읽어야 한다. 그러나 역사에서 신은 모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선택만을 허용한다. 그것이 역사를 사는 모든 인간이 직면해야 하는 괴로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