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범죄학 교수에서 보석 디자이너로 / 김인숙(사회학과 명예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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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였던 구슬 수집이 본업 돼" 버시바우 美대사 부인과도 전시회 장신구 디자이너 김인숙(69)씨는 밤 10시가 되면 상자에 '모셔둔' 구슬들을 꺼낸다. 일흔 줄 그 연배들이 대체로 잠자고 있을 시간, 김씨는 젊은이들이 즐겨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를 틀어놓고 새벽 두어 시까지 구슬을 꿰어 액세서리를 만든다. 심심풀이 소일이라고 생각하면 오산. 그녀의 '작품'은 우리 정부 고위관료가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에게 선물로 줬을 정도로 입소문이 났다. 지금은 장신구 디자이너지만, 그녀는 2003년까지 국민대에서 범죄사회학을 강의한 교수였다. 한때 '재소자의 대부' 박삼중 스님과 함께 교도소 문턱이 닳도록 사형수를 만났었다. 교수직에서 물러난 후, 그는 장신구 만드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밑바닥 인생과 비참한 현실에 대한 반작용이었던 것 같아요. 교도소 다녀온 날엔 오색 영롱한 구슬을 밤새 만지작거렸어요." 김씨는 스스로를 '보석 디자이너' 대신 '구슬 디자이너'라고 부른다. 다이아몬드나 금 같은 고가 재료가 아닌 구슬, 비취, 호박 따위 준보석으로 장신구를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구슬에 대한 집착은 남다르다. "한국전쟁 때 부산에 피난 가서 큰 엄마의 구슬백을 보고 황홀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때부터 구슬을 모으기 시작한 게 지금은 김치통 크기 박스 50개 넘게 모였어요." 단순히 구슬을 수집했던 그녀가 장신구를 만들기 시작한 사연도 무척 단순하다. "10여 년 전 친구가 놀러와서 제 구슬 컬렉션을 보더니 한 마디 던졌어요.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에 장난 삼아 '구슬을 꿰면서' 시작한 취미가 제 2의 인생을 열어줬다. 그녀는 "젊을 땐 지독한 근시가 콤플렉스였는데, 이젠 그 덕에 돋보기 없이도 작업한다"며 팽팽 돌아가는 안경알을 만졌다. 컨디션이 좋으면 하룻밤에도 목걸이와 귀고리 수십 개를 뚝딱 만들어내는 그를 사람들은 더러 '구슬보살'이라 부른다. 액세서리 가격은 목걸이가 20만~50만원, 귀고리 10만~20만원. "잃어버렸을 때 속상하지 않을 정도로 가격을 매겨요. 너무 비싸면 '소장품'이 되지 '애장품'이 아니잖아요. 난 물건에 귀속되는 건 영 싫어." 김씨 작품은 외교가와 중견 탤런트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주한 외국 외교관 부인들 사이에선 본국으로 갈 때 꼭 하나씩 사가는 품목 중 하나로 꼽힌다. 강부자, 박정자, 여운계 등 중견 탤런트도 고객. 지난해엔 공예가인 리사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 부인과 자선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김씨는 쌍용그룹 창업자인 고(故) 김성곤 회장의 장녀. 김석원 쌍용명예회장의 큰 누이다. 신문화를 일찍 깨우친 부모님 덕에 조기 유학을 했다. 1953년 일본에서 중·고등 과정을 마쳤고, 58년 혼자 미국으로 가서 오클라호마 주립대와 뉴욕대에서 공부했다. 2003년부터 매년 열어온 개인전이 올해는 오는 14~18일 서울 장충동 서울클럽에서 열린다. 전시제목은 '구슬정원'. "보석이 아니라 구슬이에요. 누구나 즐길 수 있고, 어릴 적 동심을 기억할 수 있는 구슬이지요." 일흔 할머니의 얼굴에 열 여덟 소녀의 설렘이 스쳤다. 원문보기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3&aid=0001953592 |